저주받은 몫
조르주 바타유 지음, 최정우 옮김 l 문학동네 l 2만원
조르주 바타유(1897~1962)는 악과 죽음, 금기와 위반이라는 인간 삶의 어두운 면을 천착한 프랑스 사상가다. 바타유의 글쓰기는 문학에서 철학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 있어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대다수 학자들의 경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특정한 전문 영역 없이 온갖 분야를 독창적 사유로써 관통한 사람이 바타유인데, 이 독창성은 미셸 푸코, 르네 지라르,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조르조 아감벤 같은 후대 철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에서도 확인된다. 1949년에 펴낸 <저주받은 몫>은 바타유의 ‘잡종적’ 글쓰기의 바탕에 깔린 사상의 지도를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저작이자 바타유 나름의 일반이론을 세우려는 야심이 깔린 저작이다.
이 책은 제목(‘저주받은 몫’)만으로는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언뜻 감 잡기 어렵다. 바타유가 시도하는 것은 ‘일반경제학의 구축’이다. 여기서 바타유가 말하는 ‘일반경제’는 우리 시대의 경제학이 말하는 경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바타유는 통상의 경제학이 다루는 경제를 ‘제한경제’라고 부른다. 왜 제한경제인가? 통상의 경제학은 부의 생산과 축적에 관심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인간 삶의 총체적 양상을 보면, 생산과 축적은 삶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생산과 축적이라는 표면을 걷어내면, 우리의 삶은 과잉과 소모와 낭비와 탕진으로 점철돼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통상적인 경제학의 눈에는 이 영역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생산과 축적에 반대되는 이 낭비와 탕진의 영역을 함께 보지 않으면 우리 삶의 총체성을 그려낼 수 없다. ‘저주받은 몫’(La Part maudite)이란 바로 이 낭비와 탕진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의 이성적 인식은 이 낭비와 탕진의 영역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 영역까지 포괄할 때만 우리의 경제 인식은 온전해진다. 바타유가 말하는 ‘일반경제’는 생산과 축적 중심의 ‘제한경제’에 더해 낭비와 탕진이라는 삶의 ‘저주받은’ 이면까지 모두 포괄하는 경제다.
이 일반경제를 설명하는 길목에서 바타유는 먼저 지구 표면을 뒤덮은 유기체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전체 시야에서 보면, 유기체에게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과잉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것이다. 생명체가 성장하고 있을 때는 에너지의 과잉 부분은 성장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어느 한계에 이르면 에너지는 넘쳐나게 되고 이 넘쳐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생물학적 과제가 된다. 그 과잉 에너지를 비워내는 방식으로 바타유는 ‘먹기’와 ‘죽음’과 ‘생식’을 제시한다. 먹기란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는 것을 말한다. 유기체 전체의 눈으로 보면 초식동물이 식물을 먹고,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먹는 것은 에너지의 낭비에 해당한다. 식물이 자라는 데 드는 에너지보다 동물이 살아가는 데 드는 에너지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자연계 전체로 보면 동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일 뿐이다. 유기체의 죽음도 바타유가 보기에는 일종의 과잉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일이다. 에너지로 넘치던 생명체가 그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유성생식도 마찬가지다. 성행위는 남아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성행위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1897~1962). 위키미디어 코먼스
바타유의 시선은 생물학을 넘어 인류학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바타유가 주목하는 것이 멕시코 아즈텍 문명의 희생제의다. 희생제의의 제물이 되는 사람은 전쟁에서 잡은 포로인데, 이 포로는 노예로서 생산 활동에 투입되는 것이 그 사회에는 ‘유용한’ 일이다. 하지만 아즈텍 문명에서는 이 포로를 노예로 두지 않고 제물로 썼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용한 일에 노예라는 유용한 힘을 소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용한 희생제의는 겉으로 보면 단순한 학살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속’을 떠나 ‘성’에 입회하는 일이다. “희생제의는 노예적 사용이 속되게 만들어 타락시킨 것을 다시 성스러운 세계로 돌려놓는다.” 그 희생제의에 참여함으로써 아즈텍인들은 성스러움을 경험했다. 바타유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이 바로 이 대목이다. 단순한 낭비나 탕진으로만 보였던 쓸모없는 행위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세속의 삶을 초월해 성스러움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다. 아즈텍인들에게 생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희생제의를 통한 성스러움의 경험이었다.
획득·생산·축적의 관점에서 보면 과잉·소모·탕진의 영역은 제거해야 할 영역, 다시 말해 ‘저주받은 영역’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저주받은 영역이야말로 성스러운 영역이다. 바타유가 구사하는 변증법은 헤겔 변증법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각각 고유성을 유지한 채로 그 둘 사이 긴장이 창출하는 제3의 효과를 지향한다. 바타유 사유의 그런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금기와 위반의 변증법’이다. 바타유에게 위반은 위반으로 끝나지 않는다. 위반을 통해 금기가 금기로서 드러나고 금기가 금기로서 완성된다. 우리 삶은 금기를 위반함으로써 금기를 금기로 드러내고 다시 금기의 한계 안으로 돌아온다. 금기와 위반 사이 긴장은 지속된다. 소모·탕진이 생산·축적과 맺는 관계도 다르지 않다. 생산과 축적이 없다면 소모와 탕진도 없다. 이 양자가 일반경제의 두 축을 이루는 것이다.
바타유가 말하는 ‘자연과 인간의 사물화’도 주목할 만하다. 생산은 자연을 생산에 필요한 사물로 이용함으로써 그 고유한 존재를 상실시킨다. 인간도 생산의 노동 속에서 고유한 존재를 잃어버린다. 이성적 노동이 지배하는 ‘속’의 세계에는 성스러움이 없다. 이때 잃어버린 존재의 성스러움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바로 소모와 탕진의 ‘저주받은 영역’이다. 우리는 저주받은 영역을 통해 성스러움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에서 자연은 사물화의 질서에서 벗어나 성스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인간도 ‘속’의 세계에서 잃어버린 성스러움을 되찾는다. 인간과 자연은 성스러움 속에서 하나가 된다. 여기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바타유식 사유의 역설이 빛난다. 이렇게 바타유가 구축하는 ‘일반경제’ 시론은 인간 삶의 보편문법을 새로 그려내는 시도가 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