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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양반이 되고자 하는 욕망,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

등록 2022-07-15 05:00수정 2022-07-15 16:47

재미 역사학자 ‘제2 신분집단’ 연구
중인·향리·서얼·서북인·무반 등

전환기 관료제 개혁 타고 신분상승
한국사회 강한 지위의식의 뿌리 찾아
1905년께 해평윤씨 가문 출신으로 서얼, 무관이라는 낮은 신분을 깨고 최고위층 엘리트가 된 윤웅렬(가운데)과 그의 장남 윤치호(서 있는 이) 가족의 사진.
1905년께 해평윤씨 가문 출신으로 서얼, 무관이라는 낮은 신분을 깨고 최고위층 엘리트가 된 윤웅렬(가운데)과 그의 장남 윤치호(서 있는 이) 가족의 사진.

출생을 넘어서
한국 사회 특권층의 뿌리를 찾아서

황경문 지음, 백광열 옮김 l 너머북스 l 3만2000원

한국의 근대를 설명하려 할 때 제국/식민주의의 외부 영향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수다. 그러나 때론 그 영향력을 절대화한 나머지 전근대로부터 이어져온 내부 영향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가족주의, 국가의 전방위적 개입, 사회 질서에 있어 전문가가 차지하는 위상 등 한국의 근대성에는 단지 ‘외부의 충격으로 봉건적인 전근대가 해체되고 이전에 없던 근대가 시작됐다’는 앙상한 인식만으론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으며, 이런 특수성은 근대와 전근대를 포괄하는 시야를 통해서만 그 실체와 의미를 드러낸다.

재미 역사학자 황경문(호주 캔버라대 교수)은 자신의 2004년 저작 <출생을 넘어서>에서 이런 관점을 통해 한국 근대 전환기의 “사회 계층화” 문제를 다룬다. 한국 사회는 유독 ‘지위의식’에 민감한 사회라 할 수 있는데, 지은이는 이런 높은 지위의식이 반영된 사회 위계는 전근대로부터 이어져온 전통과 근대 전환기에 그 전통을 수정하는 가운데 형성된 한국 사회 고유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지은이는 조선 시대의 ‘제2 신분집단’이라 부를 수 있는 중인, 향리, 서얼, 서북인, 무반이 조선 후기와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어떻게 상층 엘리트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는지 파고든다. 이들의 궤적은 “조선 시대 사회적 위계의 작동을 요약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세기 초 한국 사회구조의 전면적이고 심오한 변화를 보여준다.”

출생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세습적 신분 제도는 전근대 시기 한국에서도 오랜 관행이었다. <경국대전>에서 모든 관료 직급에 대해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직책과 봉급을 명문화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중앙집권 국가였던 조선은 고유의 강력한 관료제를 동원해 이런 세습 원리를 나름 합리화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그 핵심은 관료적 성취가 아닌 출생 신분에 따라 관직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를 규정한 ‘관직접근권’에 있었다. 법적으론 평민도 모든 관직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배제하는, 세습적 신분과 관직 자격을 연계시키는 사회적 계층 구조를 만든 것이다. 주목할 지점은, 귀족처럼 관직을 차지하고 자신의 신분을 세습화할 수 있지만 귀족 같은 고위직으로는 결코 진출할 수 없어 주변화된 ‘제2 신분집단’이 있었다는 점이다. 기술관료라 할 수 있는 중인, 지방 행정의 주축인 향리, 세습 신분제의 불가피한 산물인 서얼, 지역주의적 차별을 당한 서북인, 문반 아래로 격하된 무반 등이다.
1880년대 한국 관료제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통리기무아문 외무아문의 관료들의 모습. 출처 가톨릭출판사. 너머북스 제공
1880년대 한국 관료제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통리기무아문 외무아문의 관료들의 모습. 출처 가톨릭출판사. 너머북스 제공

강력한 관료제의 수혜자이면서도 ‘더 높은 지위’를 허락받지 못했던 이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국가 권력이 외부 영향에 대응하며 그 체제를 스스로 “수정”하는 가운데 새로운 변화를 포착하고 그 변화를 “몸소” 주도해나간다. 시초로 꼽을 수 있는 것은 1880년대 통리기무아문의 설치다. 전근대적 체제를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 기구는 관료를 선발하고 승진시키는 새로운 접근법을 도입했고, 이는 제2 신분집단 구성원들에게 그 뒤 갑오개혁,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했다. 예컨대 외무아문의 경우 1884년 중인인 변원규를 4명의 참의 중 한 명으로 임명했고, 이후 그를 차관급인 협판으로 승진시켰다. 1894년 갑오개혁은 공식적으로 과거제 폐지와 귀족 특권의 종식을 명시적으로 선언했는데, 그 핵심 통치기구인 군국기무처 의원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외무아문 주사 출신이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제2 신분집단 출신이었다. 일제가 3·1운동 뒤 ‘문화통치’ 국면에서 강화한 경찰력과 지방행정력은,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더 크게 가져다 주었다.

1883년 외국인 자문과 함께한 미국 최초의 한국인 사절의 모습. 뒷줄 왼쪽부터 세번째 유길준, 네번째부터 최경석, 고영철, 변수. 출처 가톨릭출판사. 너머북스 제공
1883년 외국인 자문과 함께한 미국 최초의 한국인 사절의 모습. 뒷줄 왼쪽부터 세번째 유길준, 네번째부터 최경석, 고영철, 변수. 출처 가톨릭출판사. 너머북스 제공

지은이는 중인, 향리, 서얼, 서북인, 무반 각각의 경우를 사례 연구를 통해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제2 신분집단은 세습 가문, 전문지식, 부, 부를 토대로 한 신식 교육에 대한 투자 등 전근대 체제에서 확보한 자원들을 활용해 새롭게 열린 관직과 사회의 사다리를 오르는 데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몇몇 평민의 후손이 초기 근대 관료제에서 맨 꼭대기층까지 오르긴 했지만, 평민 중에 눈에 띄게 사회 이동에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컨대 구연수(1866~1925)는 향리 가문 출신으로 갑오개혁 정부에서 관직을 차지했고 1910년대 경무국 사무관이, 뒷날 일본 총독부에선 경찰중앙기구의 2인자가 되었는데, 이 같은 그의 성공은 시대의 변화뿐 아니라 세습 상층 향리 가문이 쌓은 부와 이른 일본 유학 등의 투자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의 아들 구용서(1899~1986)는 은행업에 종사하다가 초대 한국은행 총재와 대한민국 상공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중인 가문인 천녕현씨·제주고씨, 서얼 출신인 윤웅렬·윤영렬 형제와 윤웅렬의 아들인 윤치호, 서북 출신 백경한·백경해 형제와 그 자손 등도 대체로 이러했으며, 현진건, 최남선, 이광수, 백인제 등에서 보듯 제2 신분집단 출신의 활약은 관료제 바깥까지도 아울렀다.

“한국 근대성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근대화’라는 지시문 아래에 속하는, 자본주의, 산업화, 도시화라는 측정 가능한 변화에 선행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넘어서는 문화적 근대성 혹은 ‘심성의 근대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지위의식’이란 말로 대표할 수 있는 한국 근대성의 어떤 ‘심성 구조’를 밝히는 데 주력한다. 제2 신분집단 구성원들이 발견하고 몸소 체화한 새로운 관료제는 식민지배와 뗄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한국인에게 한국의 민족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옛적부터 더욱 깊이 습성화된, 관직을 신분과 동일시하는 관념보다는 설득력이 덜했”다. 한마디로, “전근대의 ‘양반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관직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 사회적 우월성”은 오늘날까지 강력한 지위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수정”된 전통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전환기 제2 신분집단 구성원들이 “수정”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은이는 “가능성에 관한 인식, 즉 지위를 향한 강력하고도 외관상 이미 결정된 경로가 있다 해도 그 역시 습득(성취)될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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