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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광주학생운동 주역’ 박준채 시 31편 발굴

등록 2022-07-15 08:00수정 2022-10-31 11:48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선생이 쓴 원고노트 첫 확인
‘싸우다’ ‘자유’ ‘이상’ 단어 반복
항일 정신과 투쟁의지 보여줘
전남 나주 박준채 선생 생가에 보관된 선생의 학생 시절 사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전남 나주 박준채 선생 생가에 보관된 선생의 학생 시절 사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촉발한 독립운동가 박준채(1914~2001)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쓴 시 31편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한겨레>는 14일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문학)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보관하고 있는 박준채 선생의 유품 가운데 선생이 젊은 시절에 쓴 시 31편을 담은 원고 노트를 확인하고서 작성한 보고서를 입수했다. 노트에는 광주학생운동이 벌어졌던 1929년 12월31일에 쓴 시 ‘회상’부터 1940년에 쓴 작품까지 40편의 목록이 적혀 있으나 이 가운데 9편은 본문이 유실되었다.

“삼경이 다 되도록 좁은 방에서/ 기사년중 한 일을 회상을 하니/ 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하여요// 십일월삼일은 잇지 못할 날/ 더러운 저네들의 비겁행동은/ 그 누가 안 웃을 이 있을가보냐// 새 삶을 구하는 자 무산자로다/ 단결과 인내는 그들의 무기/ 힘차게 싸워라 굳새인 동지여// 피바다로 굴러가는 무궁의 대지에/ 평화로운 이상향 이룰 그때엔/ 우리도 그곧서 자유롭게 살자”(‘회상’ 전문)

박준채 선생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경과 의미를 노래한 시 ‘회상’ 원고 앞부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준채 선생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경과 의미를 노래한 시 ‘회상’ 원고 앞부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1929년 12월31일 ‘작은 사랑에서’ 썼다고 적혀 있는 ‘회상’은 박준채 자신이 촉발시킨 광주학생운동을 돌이켜보며 비겁한 일본을 비판하고 이상향을 향해 힘차게 싸워 나갈 것을 동지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이다. 박준채는 그해 10월30일 나주역 부근에서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슈조가 자신의 사촌누이인 광주여고보 학생 박기옥의 머리를 잡고 희롱하는 모습을 보고 격분해 그에게 주먹을 날렸고, 다툼은 한국과 일본 학생들 사이의 충돌로 이어졌으며, 11월3일 광주 시내의 거리 시위로 발전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 된 이 시위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지금의 11월3일 ‘학생의 날’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자 1953년 국회 의결을 거쳐 정부 기념일로 제정된 것이다.

박준채 선생이 자신의 시 목록을 적은 노트 페이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준채 선생이 자신의 시 목록을 적은 노트 페이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준채 선생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3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39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선생의 시 창작은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던 해에서 시작해 서울 시절과 일본 유학 시절을 거쳐 귀국한 1940년까지 이어졌다. 특히 선생이 일본에 유학하던 중에도 항일 투쟁 의지를 밝힌 시를 쓴 사실이 주목된다.

박준채 선생이 자신의 시 작품을 정서한 원고 노트. ‘나의 문집’이라는 일본어 제목이 붙어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준채 선생이 자신의 시 작품을 정서한 원고 노트. ‘나의 문집’이라는 일본어 제목이 붙어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우주를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 오날을 마즈막 고함인가/ 혈사(血史)의 1937년!/ 약자의 수난기인/ 풍운의 1937년!/ (…)/ 오-즉 피 끓는 젊은이여!/ 두 팔을 걷으며/ 힘찬 그들의 철완으로/ 약자를 구할지어다/ 자유로운 우리들의/ 이상을 위하야!/ 새 삶을 위하야!”(‘1937년의 제석(除夕)’ 부분)

“사랑도 명예도 황금도/ 불합리한 이 사바/ 누구를 믿으며/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님자 업는 무리들/ 오-즉 정의의 기(旗)발 아래/ 싸울지어다/ 힘차게! 굳세게!”(‘촌감’ 부분)

선생의 시에는 “피 끓는 젊은이” “싸우라” “피바다” “자유” “이상” 같은 낱말들이 거듭 등장해서 젊은이 특유의 저항과 투쟁 의지를 보여준다. 그와 함께 타국에서 조국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연모의 정 등이 시에 담겼다.

박준채 선생의 원고 노트에 적힌 시 ‘첨성대’ 전문.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준채 선생의 원고 노트에 적힌 시 ‘첨성대’ 전문.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준채 선생의 시 31편 가운데 10편은 일본어로 쓰였다. 김정훈 교수는 이 가운데 한 편인 ‘환영’을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일본 시인 사가와 아키에게 보내 조언을 구한 결과, “보내준 작품은 시로서 잘 정리된 것이고 새로운 서정성과 리듬이 있으며 일본어 표현도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는 답을 들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박준채 선생이 한국어로도 일본어로도 자연스레 시 창작이 가능할 정도로 언어 표현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일본어 작품 중에는 하이쿠나 단가도 있어서 그 당시에 그가 시문에 상당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시 창작을 즐겨 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박준채 선생의 일본어 시 ‘환영’ 원고 앞부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준채 선생의 일본어 시 ‘환영’ 원고 앞부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김 교수는 “박준채 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 실천적 면모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시 창작을 통해서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문필가로서 박준채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데에 이번 발굴의 의미가 있다”고 소개했다.

한편 박준채 선생은 해방 뒤 은행 등에 근무하다가 1960년 조선대 교수로 부임해 법학부 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1940년 이후로는 시를 쓴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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