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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광기 속에 피워 올린 푸른 창조의 불꽃

등록 2022-07-22 05:00수정 2022-07-22 09:55

장영태 교수 번역 ‘횔덜린 서한집’
20세기에 발견된 독일 민족시인

시문학에 모든 것 바친 자의 기록
프랑스 혁명의 이상 예술로 구현

횔덜린 서한집
프리드리히 횔덜린 지음, 장영태 옮김 l 읻다 l 2만2000원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은 불행한 시인의 전형이다. 시와 문학에 삶의 전부를 바쳤으나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고 정신착란 속에 긴 유폐의 삶을 살다 세상을 등진 사람이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이 불행한 시인의 문학세계가 재발견됐고 횔덜린은 독일 현대시의 선구자이자 독일 민족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떠올랐다. <횔덜린 서한집>은 이 시인의 영혼이 쏟아내는 동경과 탄식과 절규를 담은 편지 모음이다. 횔덜린 작품을 번역하고 횔덜린 평전을 쓴 독문학자 장영태 홍익대 명예교수가 횔덜린의 편지 316통 가운데 문학사적 가치가 높은 127편을 골라 옮겼다.

횔덜린은 두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네살 때 어머니의 재가로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 아버지마저 아홉살 때 세상을 떠났다.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18살 횔덜린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 튀빙겐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장차 독일 관념철학의 거두가 될 헤겔·셸링과 우정을 쌓았다. 횔덜린은 대학 시절 시문학에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고 목사의 길을 포기했다. 이후 횔덜린 일생은 시인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정신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생활인으로서 필요한 생계 방편의 확보 사이 모순과 충돌로 점철됐다.

횔덜린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시문학이지만, 이 서한집은 횔덜린이 당대 철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헤겔에게 보낸 1795년 편지는 그 시절 막 지식계의 총아로 떠오른 피히테의 저작을 읽고 얻은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횔덜린의 철학적 관심은 “주체와 대상 간의 대립, 우리 자신과 세계 사이의 대립”을 극복할 원리를 찾는 데 있었다. 칸트 철학을 두고는 이렇게 말한다. “칸트는 이집트의 무기력에서 사색의 자유롭고 고독한 광야로 민족을 이끌어내고 성스러운 산으로부터 힘찬 법칙을 가져온 우리 민족의 모세다.” 횔덜린은 독일 계몽주의-이상주의 철학에서 자아와 세계의 분열을 극복하고 조화로운 이상을 실현할 길을 찾아내려 했다.

광기 속에 창조의 불꽃을 피워 올린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 위키미디어 코먼스
광기 속에 창조의 불꽃을 피워 올린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서한집은 횔덜린의 시선이 당대 정치적 변동을 면밀히 살폈음도 알려준다. 대학 시절 프랑스대혁명(1789년)을 목격한 횔덜린은 이 혁명을 인간 자유의 실현을 향한 거대한 투쟁으로 받아들였다. 1793년 동생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언젠가 오기 마련이다. (…) 계몽의 씨앗들, 인류의 교양을 위한 개별자들의 조용한 소망과 노력이 널리 퍼져나갈 것이고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혼란에 빠져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횔덜린은 요한 고트프리트 에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혁명의 재림’을 이야기한다. “모든 발효와 해체는 새로운 유기화로 이어집니다. 소멸은 없습니다. 세계의 청춘은 우리의 분해로부터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횔덜린의 문학은 인류의 이상을 향한 그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시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횔덜린은 문학을 통해 독일 구원과 세계 구원의 길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횔덜린이 떠맡은 시인의 삶은 고통과 궁핍을 감내하는 자기희생의 삶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횔덜린은 생계를 마련하려고 가정교사직을 찾아 이곳저곳 전전했다. 1798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횔덜린은 토로한다. “너는 나의 모든 불행의 뿌리를 알고 있느냐? 나는 나의 온 마음이 매달려 있는 예술을 위해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로 오가며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술은 거장들은 먹여 살리지만 도제들을 먹여 살리지는 않는다.” 이 편지에서 횔덜린은 이런 말도 한다. “우리는 시인이 살 만한 기후에 살고 있지 않다. 열그루 초목 가운데 한그루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시기에 횔덜린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당대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기수였던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를 만난 일이었다. 1793년 실러는 그 젊은 시인에게 첫번째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실러에게 쓴 편지들에서, 횔덜린은 실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마음과 함께 실러의 인정과 지지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되풀이하여 내보인다. “선생님 앞에 섰을 때 저의 심장은 너무도 작게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곁을 떠났을 때도 그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처음 땅에 심긴 한그루 초목처럼 선생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한낮에 그 초목을 보호해주셔야 합니다.” 1799년 횔덜린은 문학잡지를 창간해 창작과 생계를 동시에 해결할 계획을 세웠다. 출판업자 슈타인코프는 한가지 조건을 걸어 동의했는데, 독자의 관심을 끌 유명인사의 글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횔덜린은 용기를 내 실러에게 기고를 요청했으나 실러는 거절로 답했다. 꿈이 몽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실러의 거절은 그렇잖아도 위태로웠던 횔덜린의 정신을 벼랑으로 몰아갔다. 앞서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공타르 집안 가정교사로 있던 시절, 젊은 안주인 주제테 공타르와 사랑에 빠졌다. 횔덜린은 주제테를 소설 <휘페리온>의 여주인공으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파국은 예정된 것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섬약한 정신을 더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횔덜린은 일자리를 찾아 스위스와 프랑스를 떠돌았으나 균형을 잃은 정신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1802년 ‘중병에 걸렸다’는 주제테의 마지막 편지가 횔덜린에게 도착했고 이어 주제테의 부고가 닥쳤다. 이때 처음 정신의 혼란이 착란의 징후를 보였다. 친구 뵐렌도르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횔덜린은 “아폴론이 나를 내리쳤다”고 썼다. 그러나 광기가 어른거리던 이 몇년이야말로 시인의 창조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횔덜린은 <빵과 포도주> <회상> <귀향> <라인강> 같은 걸작을 썼다.

1806년 9월 가까스로 버티던 정신이 무너졌고 횔덜린은 튀빙겐의 정신병원에 갇혔다. 이듬해 <휘페리온>의 애독자였던 성구 제작자 에른스트 치머가 횔덜린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횔덜린은 치머의 집 옥탑방에서 36년을 더 살았다. 횔덜린의 편지들은 광기 가까운 곳에서 살던 시인이 벌인 기나긴 투쟁과 그 투쟁 속에서 피워 올린 푸른 창조의 불꽃에 대한 선명한 기록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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