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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자연과 마주치니 “가슴이 벌렁거려”

등록 2022-08-12 05:00수정 2022-08-12 15:16

해님이 웃었어

기쿠치 치키 지음, 황진희 옮김 l 사계절(2022)

어릴 때 나는 자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자연에서 노는 것’이 싫었다. 나무가 있는 곳은 벌레가 있어서, 나무가 없는 곳은 뙤약볕이라서 싫었다. 자연 속에서는 이상하게 자꾸 뛰게 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자주 넘어지는 나는 번번이 돌부리나 나무뿌리에 걸려 무릎이 쓸리기 일쑤였다. 개울에서는 언제나 미끄러졌다. 자연은 나에게 불친절했다. 심심함에 몸부림을 칠지언정 방학 때 ‘시골’에 가는 아이들은 부럽지 않았다. 어른이 된 뒤에도 등산이나 캠핑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자연과 가까이 있는 회사를 몇 년 다닐 때 사무실을 둘러싼 풍경이나 산뜻한 공기를 좋아하면서도 어딘가 긴장이 되곤 했다. 토끼풀도 좋고 도토리도 좋은데, 벌이 코앞을 지나가거나 회의실 유리에 개구리가 붙어 있거나 하는 데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동료가 “방금 정문으로 뱀이 들어오려고 해서 관리소장님이 잡으셨대요. 백반 뿌린 거 조심하래요.” 같은 말을 무심히 하며 자리에 앉을 때, 그 말에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할 때 나는 ‘입사 3개월에 이직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까?’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자연이 어렵다.

<해님이 웃었어>는 자연에 대한 그림책이다. “바람이랑 산책”하는 어린이를 따라 책장을 넘기면서 독자는 자연의 여러 모습을 만난다. 바람은 온화하고, 벌레들은 소란스럽다. 나비는 화려하고 개구리는 과감하다. 이런 느낌은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전해진다. 새파란 표지와 샛노란 면지가 대비되고, 빨간 꽃과 파란 물빛이 어지럽게 어울린다. 강렬한 색에 끌려 도무지 책장을 덮을 수가 없다. 하지만 글은 담백하다. 개구리와 눈이 마주친 어린이가 “가슴이 벌렁거려”라고 할 때 나는 “세상에…”라고 혼잣말을 했다. 오래전 회사 뒷마당에서 고라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가 또렷이 떠올랐다. 나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런데 어린이의 자연 산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개구리를 따라 엉금엉금 기는 장면, 그림책을 함께 읽던 한 어린이가 주인공이 짚은 흙바닥을 가리키며 “이거는 똥 아니에요?” 하고 놀랐다. 자연의 흙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어둡고 무서운 자연은 “안 보려고 하는데 자꾸 눈이 따라”갈 정도로 매혹적이다.

도망치듯 숲으로 숨어든 어린이는 나무를 올려다본다. 뿌리와 가지가 비슷하게 생긴 크고 강한 나무다. 어린이도 나무처럼 자랄 것이 분명하다. 나무 위에서 노래를 쏟아내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에서 주인공은 물론이고 독자도 압도되고 만다. 목판화의 힘 있는 윤곽선과 대담한 구도 덕분이다. 이 그림만으로도 마음이 벅찬데, 놀랍게도 이 작품의 절정은 그다음 장면이다. 나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순간, 이 황홀함은 처음부터 함께한 독자만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제목의 ‘해님’은 아직 등장도 하지 않았다.

벌레와 꽃을 향했던 어린이의 시선이 나무로 하늘로 더 큰 무엇인가로 옮겨간다. 바람이 천천히 부는 것처럼 부드러운 이동이다. 어린이가 모든 생명과 손을 맞잡을 때, 어린이와 새와 개구리와 꽃과 다람쥐 들은 고만고만한 크기로 그려졌다. 큰 생명도 작은 생명도 같은 생명이라는 듯이. 그림과 글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데 모든 것이 선명하다. 글자를 모르는 어린이도 읽을 수 있고, 그림을 모르는 어른도 읽을 수 있다. 자연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다 같이” 느껴보면 좋겠다.

김소영/독서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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