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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감자를 고르며 민주주의를 성찰하다

등록 2022-08-26 05:00수정 2022-08-26 09:39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연대사회를 갈구하는 어느 지식인의 자기성찰
조형근 지음 l 창비 l 1만7000원

유익하긴 하나 유용한 지식으론 대접받지 못하는 학문을 하는 사람. 외국 대학 졸업장 없는 순수 국내파. 사회학자 조형근이 나이 오십에 이르러 정규직 교수가 됐을 때 지인들은 아낌없는 축하를 보냈다. 그로부터 1년 조금 지난 2019년 가을, 사직서를 냈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내게 어울리지 않는 길이었다”는 고백(칼럼 ‘대학을 떠나며’)의 전모를 알게 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이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는 건 비밀이 아니니까.

대학을 떠나 ‘동네 사회학자’로 살아온 조형근이 그간의 논문과 칼럼 등을 바탕으로 3년간의 고민을 책으로 묶어냈다. 그사이 ‘촛불’의 희망은 사그라들었고, 86세대는 퇴진의 대상이 되었으며, 공정과 능력주의가 지배적 담론이 되었다. 불평등과 가난의 대물림은 더욱 견고해졌고, 전 정부의 위선과 실정을 비판하며 집권한 보수는 퇴행적 태도를 답습하고 있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 선 그는 대학과 지식인의 역할을 묻는 것에서 출발한다. 왜 교수들은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가. 왜 “이상과 민중을 연결시키려던” 비판적 지식인들은 소멸했는가. 왜 대학은 “최고 수준의 등록금과 서열 구조로 민중의 고통의 원천” 중 하나가 되어버렸는가.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대학의 무의미한 톱니바퀴 노릇을 거부하고 나왔으나, 학문을 접은 건 결코 아니었다. 열심히 책을 읽고 강의를 하고 글을 썼다. 달라진 건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였다. 캠퍼스 대신 동네. 대학의 울타리 없이 밥값을 벌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지만, “스승의 무지를 일깨우는 사람들”, “뜻하지 않게 마음을 울리는 벗”을 만나는 기회였다. 지식으로 밥을 얻되 그 영리 행위에 “영혼이 깃드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다.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고 했지만 실상 그의 가장 큰 미덕은 텍스트 너머 삶의 정의로움을 돌아보는 성찰의 힘이다. 남성-서울대-86 운동권이란 자신의 정체성과 중산층의 욕망에 가려 보지 못한 것, 듣지 못한 것이 없는지, 철저히 점검한다. 이웃과 함께 감자를 캐던 어느 날, 크고 흠 없는 감자만 가려내던 그는 언뜻 깨닫는다. “실하고 상처 없는 것들을 가려내는 초월적 손”의 권력 말이다. 그러면서 그 독단을 용납하지 않는 체제야말로 민주주의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적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 몫 없는 자들의 몫”에 무감하거나 외면하는 이들이며, ‘나’를 포함해 친밀한 이웃,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해당될 수 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익숙한 관성이 아니라, ‘내가 권력일 수도 있다’는 불편한 통찰 아닐까.”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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