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자 백낙청 교수의 저작 가운데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가 있습니다. 50여년에 걸쳐 로런스 문학·사상을 탐구한 결과를 엮어 놓은 책입니다. 20세기 영국 소설가를 ‘개벽사상가’라고 부르는 것이 뜬금없어 보일 법도 한데, 이번에 나온 로런스 에세이 <아포칼립스>를 보면, 로런스가 왜 개벽사상가로 불릴 수 있는지 가늠하게 됩니다.
개벽(開闢)은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우리 역사에서 깊은 의미를 띠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다시 개벽’을 선포한 때부터입니다. 최제우의 개벽 사상은 동시대의 사상가 김일부가 <주역>을 새롭게 재해석해 다시 쓴 <정역>으로 이어집니다.(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정역>에서 김일부는 ‘후천개벽’을 이야기하는데, 이 후천개벽 사상이 희대의 종교 천재 강일순을 통해서 증산교로 꽃핍니다. 강일순은 동학혁명의 원점인 전라도 고부 출신이었는데, 그 바로 이웃 동네에서 소태산 박중빈의 원불교가 태동합니다. 소태산은 ‘물질이 개벽 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를 원불교 개교 표어로 내세웠습니다. 개벽 사상은 동과 서를 모두 극복한 새로운 문명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백낙청 교수는 이 개벽 사상이 조선 땅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소태산과 같은 시대의 영국 작가 로런스에게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로런스는 동과 서를 아우르며 서양의 편벽한 근대문명의 극복을 주창한 사람이니 개벽사상가라고 부를 만합니다. 앎이 깊어져 영성에 이르면 이렇게 동서를 회통하고 뛰어넘게 됩니다. 그 출발점이 독서일 것입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