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일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박술 옮김 l 읻다 l 2만3000원
20세기 영미 언어철학의 태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는 <논리철학논고>다. 100쪽 남짓밖에 안 되는 이 저작은 논증이나 해설을 생략하고 단정적인 선언으로만 쓰인 탓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엄격한 책 속으로 들어가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해줄 것이 없을까. 비트겐슈타인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장에서 쓴 <전쟁 일기>가 이 단단한 책 속으로 들어갈 문을 열어줄 수 있다. 일기 형식으로 쓴 이 기록은 <논리철학논고>의 본문을 이루는 철학적 사유의 최초 자료여서 본문 명제들의 발원처를 그린 지도 구실을 한다. <논리철학논고>의 출간에 다리를 놓아준 버트런드 러셀도 이 일기를 참조해 책의 ‘서문’을 썼다.
<전쟁 일기>는 애초 노트 일곱권 분량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폐증 성향이 있었던데다 결벽증을 앓았던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완성한 뒤 이 일기를 없애버리려고 했다. 러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내 일기장과 노트들은 제발 부탁이니 불쏘시개로만 쓰라”고 한 데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일곱권 가운데 네권만 소실되고 나머지 세권은 비트겐슈타인 사후에 발견됐다. 이 남은 노트만으로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떤 경로로 <논리철학논고>의 명제가 도출됐는지 알아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시민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은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자원입대해 포병부대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배치됐다. 전쟁 후반기에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옮겨간 뒤 포로가 돼 1919년에야 귀향했다. 전쟁터에 있던 이 5년 동안 노트 왼편에는 개인적 일기를 기록하고 오른편에는 철학적 일기를 기록했다. 1914년 8월9일 폴란드 도시 크라쿠프에 배속된 날 시작되는 일기는 이틀 뒤 “아직까지 작업하지 못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작업’(Arbeit)은 철학적 사유 작업을 가리킨다. 비트겐슈타인이 전쟁에 참가한 것이 전쟁터의 한계상황에서 실존의 고통을 잊으며 철학적 작업을 하는 데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구절이다.
20세기 영미 언어철학의 태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위키미디어 코먼스
비트겐슈타인은 정찰선을 타고 크라쿠프와 바르샤바를 관통하는 비스와강을 오르내리며 러시아군의 포격 속에서 철학적 작업을 해나갔다. 개인적 일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하루 종일 극도로 격렬한 포격. 많이 작업했다. 나는 아직 근본적인 생각을 얻지 못하고 있다.”(1914년 10월9일) 철학적 작업은 참전 뒤 두 달이 지나면서 본격화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때의 상황을 공성전에 비유한다. “아직까지도 성과는 없지만 강한 확신이 있다. 이제 내 문제를 둘러싸고 공성전에 들어갔다.”(10월24일) “아직도 내 문제와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 벌써 여러 거점을 점령했다.”(10월29일) 이틀 뒤에는 이렇게 쓴다. “나는 절망에 빠진 채로 문제를 향해 돌격했다!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후퇴하느니, 이 요새 앞에서 피를 뿌리고 죽는 편을 택하리라.”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최대의 난점은 정복한 거점들을 그 안에서 편히 앉아 지낼 수 있을 때까지 방어해내는 것이다. 도시 전체가 함락되기 전에는 언제고 거점에서 편히 지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도시 전체’는 비트겐슈타인이 설정한 철학적 구도 전체를 뜻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의 핵심은 <논리철학논고>의 머리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이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뜻하는 것은 이 세계,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세계의 표면이다. 세계의 표면은 논리적·과학적 언어로 기술될 수 있지만, 그 세계 너머의 ‘의미’는 논리적·과학적 언어로는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구명하려는 것이 바로 이 ‘세계’와 ‘의미’의 명확한 구분인데, 일기에서 그 구분이 명료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전쟁터의 일기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작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 톨스토이의 <복음서 해설>과 에머슨의 <에세이집> 같은 영성 깊은 책을 읽고 정신적 힘을 얻었음을 알려준다.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를 읽고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에 감정이 크게 동했다”(1914년 12월8일)고 밝히면서도 “그리스도교는 행복으로 이끄는 유일하며 확실한 길”이라고 단언한다. 일기장의 내밀한 기록들을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비트겐슈타인을 떠받친 마음의 지주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병영 생활은 비트겐슈타인의 신경이 감당하기엔 너무 거친 곳이었다. 일기 속의 비트겐슈타인은 “상스럽고 악랄한” 동료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이해받지 못한 채 모욕당하는 사람이다. 고통을 못 견딘 비트겐슈타인은 1916년 5월 “어쩌면 죽음과 가까운 거리가 삶의 빛을 가져다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최전방 정찰대로 자원한다.
적군의 총탄이 귓전을 스치는 관측망루에 배치된 비트겐슈타인은 비로소 철학적 작업의 본령으로 진입한다. 이해 겨울 ‘개인적 일기’는 죽음의 두려움과 삶의 본능을 기록한다. “총격을 받고 있다. 총성이 날 때마다 영혼이 움찔거린다.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모른다!” 동시에 같은 날 ‘철학적 일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윤리와 미학은 하나다.” 이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올바른 철학의 방법은 말해질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며, 오직 자연과학적인 것 즉 철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려 한다면 그럴 때마다 그가 자신이 사용한 문장의 몇몇 기호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문장은 그대로 <논리철학논고>의 소절을 이룬다. 이 소절만 읽으면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부정하고 거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일기는 비트겐슈타인의 진정한 관심사가 ‘형이상학적인 것’, 곧 삶의 의미를 찾는 데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전쟁 일기>는 비트겐슈타인의 마음속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