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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보 “한 민족·한 나라 평화롭게 통일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에요”

등록 2022-09-27 18:23수정 2022-09-28 02:34

[짬] 재미 통일운동가 지창보 교수

지난 9일 뉴욕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지창보 교수 모습. 박중련씨 제공
지난 9일 뉴욕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지창보 교수 모습. 박중련씨 제공

“1971년 평안도의 고향 마을을 가 보니 동네 가옥 20채가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다 사라졌더군요. 미국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했어요. 충격이 매우 컸죠.”

최근 회고록 <고독과 자유-남과 북을 사랑한 삼석 지창보 회고록>(책봄)을 낸 지창보(99) 교수에게 평생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을 묻자 나온 말이다.

1953년 미국 유학을 떠나 듀크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59년부터 1994년까지 웨이크포리스트대, 드루대, 롱아일랜드대 교수로 재직한 그는 1971년 재미동포로는 최초로 방북해 26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았다. 어머니와 형제를 만나기 위해 적잖은 위험을 감수한 ‘미국 시민권자의 비밀 북행’이었지만 고향의 자취는 간 데가 없고 모친과 큰형은 미군 폭격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재미동포 회계사 박중련씨와 그의 아들 현열(변호사)씨가 함께 엮은 회고록에는 일제 말 학병 거부 운동에 뛰어들고 해방 후에는 국대안 반대 투쟁에 참여해 우익 테러로 죽을 고비를 겪었고, 미국 유학 뒤에는 성공한 학자의 길을 걸으며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힘을 보태온 지 교수의 생애가 오롯이 담겼다.

지창보 회고록 표지.
지창보 회고록 표지.

지난 24일 오후(현지시각) 미 뉴욕 롱아일랜드 자택에 머무는 지 교수를 박 회계사의 도움을 얻어 ‘줌’으로 인터뷰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지 교수는 우리 나이로 100살 고령에도 청력이 다소 불편했을 뿐 정신은 또렷했다.

1923년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에서 태어난 지 교수의 삶은 1953년 미국 유학 전과 후로 나뉜다. 그는 도쿄 주오대 유학 시절인 1943년 말 대학 강당에서 조선인 유학생에게 학병 권유를 하던 육당 최남선의 연설이 끝나자 바로 일어나 육당에게 이렇게 대들었단다. “최 선생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서 멈출지 어찌 알겠는가, 학병으로 나가라’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역사가가 역사가 어디에서 멈출지 모른다는 말을 하시는지요? 총독부에 매수당해서 왔으면 솔직하게 나가 죽으라고 하지, 빙빙 돌려서 말을 합니까? 우리는 절대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겠소.” 20살 청년의 이 항변에 육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단다.

그는 학병을 피해 일본을 탈출했지만 결국 고향에서 붙잡혀 일본 규수 북단 야하타에서 44년부터 해방 때까지 학병으로 총을 들고 중노동에 시달렸다. 야하타는 미군의 애초 원폭 투하예정지 고쿠라와 불과 8.3㎞ 거리였으나 날씨 때문에 나가사키가 원폭 희생양이 되면서 그도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해방 뒤 고향을 거쳐 바로 단신 월남한 그는 ‘공제회’라는 피난학생 기숙사에 머물며 연세대 대학원에서 공부했지만 이듬해 제적 처분을 받았다. 1946년 7월 미 군정청이 발표한 ‘국립 서울대 설립안’, 이른바 ‘국대안’ 반대 투쟁을 위한 동맹휴학 결의에 앞장섰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모교인 평양 광성중 후배 등 월남한 젊은이들이 주축인 서북청년단 회원들이 공제회 장악을 시도하며 저지른 폭력에 맞서다 왼쪽 눈을 맞아 실신했던 기억도 책에 담았다.

대학에서 쫓겨나 미 군정청 영화과에도 잠깐 몸을 담았던 그는 부산에서 미국 기독교세계봉사회라는 피난민 구호기구의 한국사무국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다. 국대안 반대 투쟁 등으로 ‘빨갱이’로 몰린 그는 전시 부산에서도 두 차례나 체포돼 죽을 위기를 겪었단다. 한 번은 평양 출신인 동향의 국군 대위가 힘을 써, 함께 구금된 20여 명 중 그만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진보 운동’에 참여한 배경을 묻자 그는 “내가 셋째 아들이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컸다. 자연스럽게 자유를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학생 때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것을 두고는, <고조선 연구>를 저술한 역사학자 리지린 등 광성중 시절 조선인 교사들의 가르침과 학창시절 조선과 러시아 등의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을 두루 탐독한 게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주오대 유학 때도 정치사상보다 문학책을 많이 읽었어요. 소련 문학 책을 많이 봤죠. 그렇게 읽다 보면 자기 사상이 나와요.”

서른에 공부보단 목숨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미국행을 택한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유학 6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 비밀리에 북을 다녀온 뒤로는 동포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등 어려움도 겪었단다. 첫 방북을 두고 지 교수는 그해에 열린 코리아 관련 세미나에서 만난 마이클 메이어슨이라는 미국의 한 국제 전문기자로부터 평양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발단이 되었다고 밝혔다. 북한은 미국 시민에게 여행이 금지된 곳으로 알았지만 실제 많은 미국인이 북을 다녀왔다는 말에 가족을 만나려고 방북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99살 맞아 회고록 ‘고독과 자유’ 출간
부제 ‘남과 북을 사랑한 삼석 지창보’
1953년 유학·사회학 박사·대학교수
1971년 가족 만나러 ‘재미동포 첫 방북’
이웃 김향안 부탁 ‘김환기 장례’ 주관

“향수 담아 그린 작품들 한국 전시 꿈”

그는 1973년 두 번째 방북에서 두 여동생과 그 가족을 만났고 가장 최근은 93살 때인 2016년에 북을 다녀왔다. 그는 책에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재직 중인 롱아일랜드대학으로 미 연방수사국 요원이 찾아와 ‘광주민주화운동에 북이 연루되었는지’ 물었다”고 적었다. 그의 방북이 알려진 뒤 뉴욕의 한국총영사관이 롱아일랜드대학에 자신의 파면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대학 쪽에서 “지 교수는 미국 시민이기에 한국총영사관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한국 영사관에서 롱아일랜드대학 학장에게 나를 좌익이라고 말해 학장이 끝까지 나를 의심했어요. 그 때문에 대학의 주요 행사에 초대받지 못하기도 했죠.”

그가 반세기를 넘겨 사는 롱아일랜드 북쪽 해안가 자택은 화가 김환기·김향안 부부와 작곡가 윤이상, 소설가 황석영 등 한국의 저명한 문화계 인사들이 즐겨 머문 곳이기도 하다. 윤이상 선생은 1970년대 초 뉴욕에 올 때마다 딸 집보다 독신인 그의 집이 편하다며 늘 찾았다고 한다. “동베를린사건 뒤 윤 선생이 우리 집에 오래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 나도 이북을 다녀온 뒤라 중앙정보부가 신경을 곤두세우던 시기였다. 그때 집 2층 화장실 창문을 탈출구로 정해 놓고 그 창문을 늘 열어 놓은 채 잠을 잤다.”

지 교수(왼쪽 네째)가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석방을 요청하는 100만인 서명지를 유엔 인권위에 전달할 때 사진이다.
지 교수(왼쪽 네째)가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석방을 요청하는 100만인 서명지를 유엔 인권위에 전달할 때 사진이다.

지난 9일 뉴욕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지난 9일 뉴욕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왼쪽이 책을 엮은 박중련 회계사다.
왼쪽이 책을 엮은 박중련 회계사다.

1974년 김환기 화백 별세 때는 김향안의 부탁으로 장례도 주관했단다. 그는 책에서 김환기 부부와 밤새 옛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시인 이상 이야기를 무심코 꺼내자 김향안이 바로 안색을 바꾸고 “집에 가자”라며 남편과 함께 나갔던 일화도 적었다. 그때만 해도 김향안이 이상의 부인(변동림)이었다는 걸 모르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 뒤로 2년 가까이 지 교수에게 연락을 끊었던 김향안은 남편이 수술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자 그를 찾았고 뒤에 장례식 주관까지 청했단다.

197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한국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여러 단체에서 활동한 그에게 최근 냉랭한 남북관계에 대한 의견을 구하자 이렇게 답했다. “남과 북은 한 민족이고 한 나라잖아요. 같이 살아야죠.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게 소원이에요.”

지 교수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아낀다는 연꽃 그림. 지 교수는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이 연꽃 그림을 쳐다보았다고 한다.
지 교수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아낀다는 연꽃 그림. 지 교수는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이 연꽃 그림을 쳐다보았다고 한다.

지 교수는 1971년 방북을 위해 들른 파리에서 알제리로 향하기 전 광성중 후배 김창열(오른쪽) 화백을 만나 몽마르트 언덕 등을 관광했다. 지 교수는 책에 당시 생활이 곤궁했던 김 화백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썼다.
지 교수는 1971년 방북을 위해 들른 파리에서 알제리로 향하기 전 광성중 후배 김창열(오른쪽) 화백을 만나 몽마르트 언덕 등을 관광했다. 지 교수는 책에 당시 생활이 곤궁했던 김 화백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썼다.

그는 뉴욕에서 10여 차례 전시회를 연 동양화가이기도 하다. 회고록에는 그가 평생 그린 담박하고 조형미도 돋보이는 150여 점의 그림 대부분이 실렸다. 박중련씨는 “한국에서 전시회를 하고 작품이 한국이나 미국의 유수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는 것이 지 선생님의 마지막 꿈”이라고 전했다.

회고록에는 ‘나의 영원한 연인 최윤애’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가 한국전쟁 2~3년 전에 친지의 소개로 만나 미국 유학 중인 1957년까지 인연을 이어간 최윤애 전 이화여대 교수에 대한 글이다. 두 사람이 듀크대에서 함께 학위 과정을 밟다 최 교수가 먼저 석사 학위를 따고 고국으로 떠나면서 둘은 ‘견우직녀’가 되었단다. 지 교수는 고국 방문 규제가 풀린 1997년 방한해 40년 만에 역시 독신으로 살던 최 교수를 만났고 2002년 방한 때는 시각 장애인이 된 옛 연인을 보고 죄의식을 느끼기도 했단다. 6년 전에는 전화로 별세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지 교수는 학업 등을 이유로 최 교수와 결혼을 서두르지 못 한 게 “마음이 아프고 후회된다”고 했다.

책으로 나온 회고록을 본 소감을 묻자 그는 “내가 이런 자격이 있을까, 황송하다”고 답했다. 그는 책에 삶은 “아름다운 꽃을 주우며 걷는 길”이라고 썼다. 인터뷰 끝에 ‘좋은 삶’에 관해 묻자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오랜 독신 생활에서 오는 (지창보) 선생님의 미묘한 ‘고독과 자유’의 분위기를…” 작가 황석영이 지 교수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회고록 제목에 왜 고독과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가는지 알려준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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