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방통 홈쇼핑
이분희 지음, 이명애 그림 l 비룡소(2019)
홑이불을 빨아 널었다. 하늘이 높고 푸르러졌으니 시간만큼 정직한 건 없다. 한낮은 아직 뜨겁지만 햇빛과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가을이다. 이맘때면 한윤섭의 동화 <우리 동네 전설>을 떠올리곤 했다. 도시 소년이 복숭아꽃이 필 때 시골로 와서 밤을 수확하는 늦가을까지 만난 마을의 전설이 소재다. 고개마다 굽이굽이 담긴 ‘전설’을 아는 작가가 더는 없을 테니 이런 작품을 또 만나는 게 어려울 거라 여겼다. 놀랍게도 <신통방통 홈쇼핑>에서 전설은 홈쇼핑과 만났다. 사람이 사는 한 이야기는 피어나고 새로운 전설은 만들어지게 마련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신도시가 들어선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는 제각말(祭閣里)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묘와 제각이 있던 마을이란 뜻이다. 이처럼 옛 마을은 이야기가 있는 법. <신통방통 홈쇼핑>은 ‘독각’마을이 무대다. 이곳이 독각(獨脚) 혹은 ‘도까비골’이라고 불린 이유는 높은 고갯길에 종종 도깨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5학년 찬이는 아빠가 사업에 실패한 후 큰아버지가 사는 독각면으로 전학을 왔다. 할아버지 홀로 사는 집에는 낡은 구식 텔레비전 한 대와 백살이 넘은 상수리나무가 있을 뿐 놀 거리가 없다. 학원에 가고 동영상을 보고 게임을 하던 찬이에게 시골의 하루는 길고 심심하다. 눈치챘겠지만 이제 어린이가 판타지를 만들 차례다.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이런 작품을 읽고 있자면 판타지란 결국 ‘보이지 않는 걸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싶다. 당장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도 꿈을 꿔야 미래를 만들 수 있으니까.
찬이는 낡은 텔레비전을 돌리다 ‘신통방통 홈쇼핑’ 채널을 만난다. 엄마가 좋아하던 홈쇼핑. 하지만 찬이가 살 건 없다. 전원을 끄려는 순간 쇼호스트 두 명이 찬이를 열심히 꼬드긴다. ‘도깨비감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호들갑스레 말하고, 값은 마당에 뒹구는 상수리 도토리 한 됫박이면 충분하단다. 뭔가에 홀린 듯 도깨비감투를 주문한 찬이는 투명 인간이 되어 거들먹거리는 대성이를 골려준다.
이제 찬이는 혼자 있을 때마다 신통방통 홈쇼핑 시간을 기다린다. 떡갈나무 잎을 넣으면 돈으로 바뀌는 요술 지갑도 사고, 변신이 가능한 초소형 구미호 꼬리도 산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지만 차차 목적이 달라진다. 명석이 할머니의 병원비를 내려고 여우 수염을 사용한 적도 있다. 여우 수염을 붙이면 원하는 만큼 부자가 되는 신통력이 있다고 했으니까. 알고 보니 병원비는 여우 수염이 아니라 할머니에게 과거 신세를 진 신사가 갚았다. 무엇이 요술이고 무엇이 사실일까.
판타지와 진실이 겹쳐지고 한바탕 꿈이었나 싶을 무렵 여운이 남는다. 우리 문화 속 도깨비는 착한 사람을 돕고 못된 사람에게 대가를 치르게 한다. 장난이 심하고 도토리묵을 좋아한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친구 명석이가 흡사 도깨비 같다는 데 실마리가 있다. 초등 고학년.
한미화/출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