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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비관주의자 김연수의 ‘변심’ “누군가를 기억할 때 바뀐다”

등록 2022-10-07 05:00수정 2022-10-07 11:39

9년 만의 신작 단편소설집 통해
‘절멸금지’의 이토록 집요한 논증

“기억해야 하는 건 과거 아닌 미래”
청춘세대 향한 8편의 ‘상실 그러나…’
김연수 작가는 지난 4일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며 되돌아보는 시야와 내다보는 시야가 동시에 생기더라”며 “두 가지 시야가 생기면서 (이번 작품 속) 그런 소재들을 다루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관형. 문학동네 제공
김연수 작가는 지난 4일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며 되돌아보는 시야와 내다보는 시야가 동시에 생기더라”며 “두 가지 시야가 생기면서 (이번 작품 속) 그런 소재들을 다루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관형. 문학동네 제공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l 문학동네 l 1만4000원

세상엔 최소한 네 종류의 책이 있겠다. 읽어선 아니 될 책, 읽지 않아도 될 책, 한번은 읽어야 할 책, 한번만 읽어선 안 될 책.

김연수 작가가 이번에 내놓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사월의 미, 칠월의 솔>(2013) 이후 9년 만의 신작 단편소설집이다. 다작의 소설가에게 그 9년은 9개월 가을처럼 낯설어 징후적인데, 스스로 “비관으로 함몰됐”다던 그 기간 장편소설도 8년 만에 펴낸 <일곱 해의 마지막>(2020)이 유일했다. 그의 말 몇 대목을 찾아 주석 삼아본다. 이북에 남은 시인, 말하자면 주체시도 서정시도 쓰지 않아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무엇보다 ‘나’를 지켰다 보는 백석(<일곱 해의 마지막>)을 쫓아 작가가 고뇌한 ‘쓰지 않음의 문학’(<한겨레> 2020년 7월 인터뷰)과 이번 단편집 속 “쓰고 싶은 게 없을 때는 쓸 수 없다”는 ‘작가의 말’(2022년 가을)은 같은 인과로 엮인, 같은 기억이자 같은 말이며 같은 작가적 도리이다.

때마침 나이 쉰을 넘어서며 비관에서 낙관으로의 담금질이 뚜렷해진 지점서 김연수(52)의 소설집, 당장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나 그중 먼저 쓰인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만 해도 일독으론 다 낚지 못할 만큼 여운의 출처는 깊다. 결국 다 사랑 얘긴데 말이다.

세기말적 예언이 넘치던 1999년, 대학 같은 과 동기인 남녀는 2학년 1학기 여름 종강쯤에나 사랑하게 된다. 첫 대면에서 방학 계획을 묻는 ‘나’(준)의 외삼촌에게 여자친구 민지는 “조카분은 저랑 따로 할 일이 있어요”라 실토할까 애태울 만치 대담하고 염세적이다. 오래 짝사랑해온 준에게, 자살한 엄마로 인한 상처와 남은 가족에 대한 분노 가득한 민지를 품는단 건 민지가 작정한 절멸의 세계로 잠긴단 얘기였다. 조만간의 동반자살.

결행을 앞두고 외삼촌을 찾았던 것인데 민지의 엄마에게 자살이 원인이 된 70년대 중반 공모 당선소설 <재와 먼지> 때문이다. 해방 뒤 출간서적을 다 읽진 못해도 다 만져는 봤다는 출판인 외삼촌한테 확인한 사실은 “1972년 10월을 우리는 시간의 끝이라고 불렀다”는 작품의 첫 문장과 유신정부의 판금 조처로 추려진다. 정작 소설은 사랑의 끝(“시간의 끝”)을 지레 피하고자 동반자살했으나 대신 임사체험을 하는 남녀의 이야기다. 둘은 사랑하던 과거로 하루하루 거슬러 과연 ‘처음’ 만났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현실처럼 감각하며 한번의 삶을 더 희구하고, 깨어나 사실상의 세 번째 삶을 함께 이어간다.

김연수 작가는 지난 4일 &lt;한겨레&gt;와 전화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며 되돌아보는 시야와 내다보는 시야가 동시에 생기더라”며 “두 가지 시야가 생기면서 (이번 작품 속) 그런 소재들을 다루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관형. 문학동네 제공
김연수 작가는 지난 4일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며 되돌아보는 시야와 내다보는 시야가 동시에 생기더라”며 “두 가지 시야가 생기면서 (이번 작품 속) 그런 소재들을 다루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관형. 문학동네 제공

‘역행’의 진실은 미래가 ‘결과’가 아닌 ‘원인’으로서 현재를 전개시킨다는 데 있다. 엄마의 지난 자살 때문이 아닌 “앞으로 두 사람이 결혼하기 때문에” 둘이 지금 이곳에 있다 쳐보자는 외삼촌의 ‘아재식’ 사고실험은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는 그의 비트겐슈타인식 사유(“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한다)로 그럴 법해진다.

미래는 ‘바람’이자 ‘기억’되는 무엇이다. 그리하여 과거만 기억하는 우리에게 시간은 비로소 확장되며, 이러한 시간의 중층성은 언어로 확보된다. 행여 모호하게 들린다면 그때 필요한 건 물리공식이나 우주론…이 아니다. 다시 김연수. 이번 소설집 수록된 8편은 거개 상실(죽음), 기억, 시간 그리고 바람(중의적이다)이라는 네 낱말을 부표마냥 깊고 너른 이야기의 바다에 띄워두고 있다.

엄마와 사별 뒤 치매에 걸린 아빠를 6년간 돌보던 20대 여성이 아빠 살인 혐의를 받은 채 집을 불태우고 아빠의 행복한 시절이 멈춘 제주의 옛 신혼여행지를 찾기까지(‘진주의 결말’), 200여년 전 백서사건으로 참수된 천주교도 황사영의 아내가 관노가 될 아이를 살리고자 스스로 죽기를 시도했다 다시 살기를 결심하기까지(‘난주의 바다 앞에서’) 등등 그 모든 곳에선 거센 바람이 불었고, 기억은 선택될 수 있다는 작가의 바람이 그 바람에 실려, 시간을 보듬는다.

세월호 아이들이 겹쳐지는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사랑의 단상 2014’는, 기억하는 한, 사랑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세월호와 관계없다. 한 시절을 영원히 기억해 과거를 미래로 기어코 구부려 놓는 실제 세월호 사람들의 언어를 닮아갈 뿐이다, 도리 없이.

2004년 4월 중순, 남자가 여자 몰래 남긴 메모엔 더 먼 미래까지 지속될 사랑에 대한 미래의 고백이자 기억이 적혀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는 걸 네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뿐. 2014년 4월16일”(‘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미래는 어떻게 과거가 되는가, 둘은 정녕 이별하긴 한 것인가….

이 세계엔 네 가지의 언어가 있겠다. 들어선 안 될 거짓의 말들,안 들어도 될 흔한 말들, 한번은 듣게 될 우리의 말, 단 한번도 잊지 못할 그대의 말.

맨 마지막의 말을 추앙하는 작품들, 어지간해선 한번만 읽고 덮기 어렵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후기 비관과 낙관 사이

김연수 작가는 2020년 7월 “40대의 10년가량 비관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지난 4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로 보태자면 “더 나빠지는 세계”를 버텨야 할 까닭에 대한 회의였고, 이제 “한결 낙관적이 되었다” 말한 데엔 ‘백석’과 ‘정난주’로 얻은 일정의 답이 있기 때문이다. “(관노가 된) 정난주는 살기로 한 뒤로 (관노가 된) 아들을 평생 만나지 못했다는 게 공식 역사인데, 정난주는 끝내 살아갔다.” 비관과 낙관은 어떻게 결부되는가. 50대 김연수의 작가적 포부로 읽힐 수도 있어 인상적인 단락. “…이야기 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비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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