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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자연스럽고 정당한 노동의 풍경

등록 2022-10-14 05:00수정 2022-10-14 11:47

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

달구지를 끌고
도날드 홀 글, 주영아 옮김, 바바라 쿠니 그림 l 비룡소(1997)

시인 도날드 홀이 쓴 <달구지를 끌고>의 첫 문장은 이렇다. “10월이 되자, 농부는 소를 달구지에 매었어.” 배경, 인물, 행동이 한 문장에 들어 있다. 바바라 쿠니의 그림도 문장을 그대로 옮긴 듯 소박하다. 농부와 소와 달구지, 그리고 낙엽과 단풍이 전부다. 이렇게 시작되는 그림책은 좋아하지 않기가 힘들다.

이 그림책은 한 농부 가족의 가을부터 봄까지를 담고 있다. 농부는 일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기르고 만든 것들을 달구지에 싣는다. 농부가 깎은 양털과 그것으로 아내가 짠 숄, 딸이 뜬 장갑, 아들이 부엌칼로 깎은 빗자루. 감자와 사과, 아이들이 뒷마당에서 알뜰히 주워 모은 거위 깃털도 한 자루 있다. 달구지 안에 든 것으로 먹고 입고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농부 가족은 필요한 것을 직접 기르고 만들어 왔다. 달구지에 실리는 물건들은 그들이 쓰고 “남겨 둔 것들”이다.

농부가 달구지를 끌고 열흘이나 걸어가 도착하는 곳은 시장이다. 그는 싣고 온 모든 것을 판다. 물건이 다 팔린 다음에는 달구지를 판다. 달구지를 끌고 온 소와 그 멍에와 고삐도 판다. 시장에서 새로 산 물건들을 달구지에 싣고 돌아가리라 짐작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농부의 표정은 느긋하다. 그가 산 것은 수예 바늘, 주머니칼, 작은 무쇠솥과 박하사탕이 전부다. 농부 가족이 직접 만들기 어려운 것들이다. 농부는 남은 돈은 주머니에 넣고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간다. 시원스러운 풍경이 농부의 홀가분한 마음을 보여준다.

겨우내 농부 가족은 또 성실하게 일한다. 송아지를 돌보고, 새 멍에를 만들고, 새 달구지를 만든다. 가족들은 천을 짜고 수를 놓으며 빗자루를 깎고 단풍나무 수액을 받아 설탕을 만든다. 봄이 오자 양털을 깎고 밭을 일군다. 나는 농부의 아이들이 수예 바늘과 주머니칼을 받았다는 점이 좋다. 일한 만큼 인정받고, 더 성장할 기회가 주어지는 점이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하는 장면이 대부분인데 어째서 ‘힘들겠다’ 하는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일까? 모두의 표정이 평온하기 때문이다. 다채로운 색으로 섬세하게 표현된 그림도 아름답다. 실제 노동의 풍경이 아름답기만 할 리 없다. 하지만 농부 가족은 노동의 대가가 정직하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힘을 모아 생활을 꾸리고, 노동의 결과를 시장에서 다른 물건으로 교환할 수 있다. 돈을 남겨서 가질 수도 있다. 노동이 자신들을 먹이고 입히며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그저 이상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풍경이다.

우리 어린이들에게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빵을 만들고 물건을 나르고 건물을 짓는 노동자들은 어린이의 가족이고 이웃이다. 사회가 노동을 가치 있는 것, 정당한 보상이 있는 것, 삶을 지켜내는 것으로 여길 때 어린이도 그렇게 배운다. 그런 노동자가 된다. 새 교육과정에서 ‘노동’을 지우려 한다는 기사를 읽고 이 그림책을 다시 보았다.

김소영 독서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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