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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등록 2022-10-21 05:01수정 2022-10-21 09:48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정현종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2000원

“우리가 사는 이 터전/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도 많아/ 강세 ‘어휴’가 오고,/ 아침이 오고,/ 강세 ‘에이’가 오고,/ 지상의 어떤 나라/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밑에서/ 피범벅이 된/ 다섯 살 아이 옴란 다크니시가 오고,/ 구역질이 오고,/ 한숨이 이 행성을 덮고,/ 눈물이 어디선가 발원하여/ 강을 이루고,/ 아침이 오고,”(‘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부분)

1965년 등단한 뒤 지치지 않고 자신의 시 세계를 갱신해온 정현종 시인(83)이 7년 만에 새 시집을 내놨다. 노시인은 세상을 둘러싼 슬픔과 “모든 떠남과 돌아옴의 슬픔/ 기억과 망각/ 피로와 체념의 슬픔”(‘걸음걸음마다 슬픔이’)을 노래한다. 동시에 “벌써 삼월이고/ 벌써 구월이다// 슬퍼하지 말 것.// 책 한장이 넘어가고/ 술 한잔이 넘어갔다.// 목메지 말것.// 노래하고 노래할 것.”(‘벌써 삼월이고’ 전문)을 다짐한다. ‘이른 봄’이 되면 “겨우내 차갑던 돌은/ 스멀거리는 것들과 함께/ 다시 자라며 노래”(‘이른 봄’)할 것이고 “사월 초순/ 공원 습지를 지나며/… / 꾸와악, 꾸와왁, 꾸와왁/ 천지에 기쁨이 넘치”(‘개구리들의 합창이여’)는 개구리들의 합창을 들을 수 있을 테니. 슬픔과 기쁨이 한데서 만나고 “마음이 녹아들지 않으면/ 세계는 잿더미요/ 삶은 쓰레기 더미이다.”(‘녹아들다’) 시인은 책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렇게 노래한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놀다’ 전문) 이는 시인이 온몸으로 녹아들어가려는 “삶의 전부인 저/ 진실의 순간”(’녹아들다’)일 것이다.

정현종 시인.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정현종 시인.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시가 끝난 지점에서 시인은 시를 이야기한다. 지난해 6월 온라인 동영상으로 했던 강연을 산문 ‘시를 찾아서’로 책 뒷부분에 실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 살았던 유년 시절을 회고하며 “시는 우리 모두 속에 깃들어 있는 자연과 어린 시절을 되살려내는 언어이며 우리 자신인 원소들의 꿈의 언어적 실현”이라고 말한다. “시적 이미지가 우리를 가볍게 하고 우리를 들어올리고 우리를 상승시킨다”고 말한 철학자 바슐라르를 인용해 시적 이미지는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고 그 효용을 설명한다. 마음이 가벼워야 마음을 무겁게 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삶을 견디게 하”는 예술의 본원적 역할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노시인에게 시는 새의 깃털처럼 가벼운 ‘깃-언어’가 되고 팔순의 깨달음은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노는” 깃-언어를 빚어냈을 터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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