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회고록 펴낸 범민련 남측본부 김영승 고문
올해 만 87살인 김영승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 본부 고문은 한국전쟁 기간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한 생존자 중 유일한 비전향자다.
전남 영광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5살에 입산해 4년 동안 한국군에 총부리를 겨눈 빨치산으로 살았다. 1954년 2월 총탄 3발을 맞고 체포된 그는 그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무기 감형을 받았다. 4·19 뒤 다시 형기가 20년으로 줄었으나 만기 뒤에도 반공법 위반 2년과 감호처분 13년을 더해 모두 35년을 묶인 몸으로 살았다.
옥살이 동안 소년 시절 일을 또렷이 기억해내 녹음기라고도 불렸다는 그가 최근 빨치산 4년 활동을 정리한 책 <김영승 회고록-백운산 봉우리에 남겨진 이름 마지막 소년 빨치산>(통일뉴스)을 냈다.
지난 21일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서 김 고문을 만났다.
“작년부터 뇌졸중 증세가 있어요. 언제 죽을지도 몰라 빨치산·감옥·사회 편으로 책 세 권을 서둘러 내려고 해요. 이번에 빨치산이 나왔고 내년까지 두 권을 더 내야죠. 감옥 편은 거의 다 썼어요.”
1990년 무렵부터 대학생들과 함께 ‘빨치산 현장’ 답사도 꾸준히 해온 그는 올해는 한도숙 전 전농 의장 등과 함께 ‘전국묘소답사반’을 만들어 전국에 흩어진 빨치산 사망자 묘소 참배도 하고 있다. 올해 묘소 답사를 마무리하고 내년에 묘소 위치와 매장자 경력, 추모사 등이 담긴 책도 낼 계획이라고 했다.
먼저 왜 전향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내 선택이 옳았으니까요. 1973년 겨울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깡패까지 동원한 전향 공작에 끝까지 버텼어요. 내 몸을 매달아 놓고 밧줄에 물을 묻혀 때리더군요. 물고문도 당했죠. 하지만 두들기고 압박하는 사람에게 굴복할 수는 없었어요.”
그는 왜 빨치산 역사를 기억하려고 애쓰느냐는 질문에 “빨치산 정신을 이어받고 그 정신을 받들어 생활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빨치산 정신은? “반미반제입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빨치산 혁명의 길’에 있다고 생각한단다. “나 자신은 혁명가라고 생각하지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어요.”
책에는 저자가 겪은 빨치산 체험과 그가 만난 빨치산 간부들의 모습이 많이 담겼다. 그는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알려진 이현상이 최후를 맞던 1953년 9월18일 새벽에 지리산 꽃대봉(현 토끼봉)에서, 국군이 빗점골의 이현상 부대를 공격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단다. “빗점골을 내려다보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는데 동이 틀 무렵 빗점골에서 총소리가 바글바글 골짜기를 울리더군요. 그날 오후 이현상 동지 일행 중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는 이현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항상 인민군 장교복과 모자 차림이었어요. 다른 빨치산들은 다 (위장을 목적으로) 한국군 군복을 입었거든요. (이현상은) 늘 인민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죠.” 전남 빨치산 총사령관을 지낸 김선우를 두고는 “하부 성원들에게 반말이나 ‘해라’를 하지 않는 고매한 인품이어서 일꾼들이 우러러 받들었다”고 기억했다.
전남 영광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1950년 15살 때 입산해 4년 활동
감호처분 13년 포함 35년 옥살이
‘소년 빨치산’ 생존자 중 유일한 비전향 빨치산·감옥·사회 ‘3편’ 중 첫권
‘백운산 봉우리에 남겨진 이름…’
“지금도 해방전후와 본질은 같아” 그의 부친은 20년 머슴살이로 얻은 논 10여 마지기 소작을 일구며 산 빈농이었단다. “농사를 지어도 이리저리 뜯기면 봄에 먹을 게 없어 아버지는 산에서 숫돌을 캐 장날에 팔아 식량을 마련해야 했어요. 11살, 13살 두 여동생이 속옷도 없이 통치마 하나로 1년 내내 지낼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일제 말 서당에서 글을 배운 그는 해방 뒤 초등학교에 다니며 동네 부잣집 사랑방에서 문맹자에게 글과 산수도 가르쳤단다. 이 사랑방 야학엔 좌익 청년들이 와서 연설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이 영향으로 그도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때 대학 진학도 마음에 두었지만 내 조건에서는 이룰 수 없었죠.”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했고 학교 씨름대회에선 늘 1등이었던 그는 고향 마을이 인민군에서 국군 치하로 바뀌자 인근 불갑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 첫해 초겨울까지 민소매 하나로 버텼고 1953년 겨울에는 전투복에 ‘메리야스’ 하나로 산중에서 겨울을 났단다. 바느질도 잘 해 빨치산 시절 항상 큰 바늘과 실을 가지고 다니며 고무 밑창을 구하면 무명베로 ‘농구화’를 직접 만들어 신었다고도 했다. 산중에 토벌대가 없을 때는 ‘작전’에 나서기 전 늘 오락회를 했고, 목수 빨치산이 널따란 바위 위를 며칠씩 정으로 쪼아 만든 확독에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다는 이야기도 그의 기억 중 일부다. 그는 책에서 영화 <남부군> 영상을 보니 빨치산들이 거지보다 더 남루한 옷을 입고 나오던데 과장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옷이 찢기면 바느질로 꿰어 입지 그대로 생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빨치산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그는 바로 “인민을 약탈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빨치산은 후방이 없어 모든 것을 자체 해결해야 했어요. 초기 식량 보급을 할 때는 해방 되면 보상해주겠다고 사인을 해줬지만 나중에는 시간이 없어 구두로 약속했죠. (빨치산이 활동하는) 유격 지구 농민들도 먹을 쌀을 다 지서에 맡겨놓고 타다 먹도록 해놓아서, 보급 사업을 나가도 배낭 하나 챙기지 못 했어요. 사흘 이상은 먹을 수 없었죠.”
그는 빨치산 시절 지뢰를 밟아 몸 50군데에 지뢰 파편이 박히기도 했단다. ‘소년 빨치산’으로 숱하게 생사 기로를 넘긴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천재지변이 있지 않은 한 꼭 살아나간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배운 침술도 건강에 도움이 되었단다. “철사를 달포(한 달이 넘는 기간)쯤 갈아 직접 침을 만들었죠. 그 침으로 간수 치료도 해줬어요. 옥에서 나올 때 양말 속에 숨겨 가지고 나온 침이 지금도 집에 있어요.”
인터뷰 말미에 해방 전후와 지금의 한국은 비교하기 힘들 만큼 다른 나라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는 “현상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받았다. “하루 한 끼 먹다 세 끼 먹는다고 좋아졌다고 할 순 없어요.” 지난 삶에서 언제 가장 좋았냐고 하자 그는 “좋았을 때가 별로 없다”고 답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활개 치는 사회 제도가 되어야 좋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는 1991년 결혼해 조화 제작 전문가인 외동딸을 두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김영승 고문이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김영승 고문이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600/399/imgdb/original/2022/1027/20221027503756.jpg)
김영승 고문이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김영승 고문이 최근 낸 회고록. 통일뉴스 제공 김영승 고문이 최근 낸 회고록. 통일뉴스 제공](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300/419/imgdb/original/2022/1027/20221027503752.jpg)
김영승 고문이 최근 낸 회고록. 통일뉴스 제공
1950년 15살 때 입산해 4년 활동
감호처분 13년 포함 35년 옥살이
‘소년 빨치산’ 생존자 중 유일한 비전향 빨치산·감옥·사회 ‘3편’ 중 첫권
‘백운산 봉우리에 남겨진 이름…’
“지금도 해방전후와 본질은 같아” 그의 부친은 20년 머슴살이로 얻은 논 10여 마지기 소작을 일구며 산 빈농이었단다. “농사를 지어도 이리저리 뜯기면 봄에 먹을 게 없어 아버지는 산에서 숫돌을 캐 장날에 팔아 식량을 마련해야 했어요. 11살, 13살 두 여동생이 속옷도 없이 통치마 하나로 1년 내내 지낼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일제 말 서당에서 글을 배운 그는 해방 뒤 초등학교에 다니며 동네 부잣집 사랑방에서 문맹자에게 글과 산수도 가르쳤단다. 이 사랑방 야학엔 좌익 청년들이 와서 연설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이 영향으로 그도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때 대학 진학도 마음에 두었지만 내 조건에서는 이룰 수 없었죠.”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했고 학교 씨름대회에선 늘 1등이었던 그는 고향 마을이 인민군에서 국군 치하로 바뀌자 인근 불갑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 첫해 초겨울까지 민소매 하나로 버텼고 1953년 겨울에는 전투복에 ‘메리야스’ 하나로 산중에서 겨울을 났단다. 바느질도 잘 해 빨치산 시절 항상 큰 바늘과 실을 가지고 다니며 고무 밑창을 구하면 무명베로 ‘농구화’를 직접 만들어 신었다고도 했다. 산중에 토벌대가 없을 때는 ‘작전’에 나서기 전 늘 오락회를 했고, 목수 빨치산이 널따란 바위 위를 며칠씩 정으로 쪼아 만든 확독에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다는 이야기도 그의 기억 중 일부다. 그는 책에서 영화 <남부군> 영상을 보니 빨치산들이 거지보다 더 남루한 옷을 입고 나오던데 과장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옷이 찢기면 바느질로 꿰어 입지 그대로 생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영승 고문. 강성만 선임기자 김영승 고문. 강성만 선임기자](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600/399/imgdb/original/2022/1027/20221027503754.jpg)
김영승 고문.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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