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의 문장들
상언에서 독자 투고까지,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서
김경미 지음 l 푸른역사 l 2만원
1898년 9월1일 서울 “북촌의 여중군자” 몇 명이 여학교의 필요성과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내용으로 ‘여학교설시통문’(여학교통문)이라는 글을 냈다. 최초의 근대적인 여권선언이라 할 만한 이런 발화가 나온 데에는 서구의 근대 계몽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지만, 조선 후기로부터 이어져 온 여성 인식의 변화 역시 그 배경에 있었다. 집권세력이 오래 거주해온 북촌의 여성들이 통문의 핵심 주체였고, 이들 중심으로 결성된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 축첩 제도 철폐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잇따라 올렸다. 여성들의 공적 발화를 근대적인 형태로 활성화시킨 것은 신문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이었으나, 여성의 공적 발화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전을 사회사적·젠더적 시각으로 연구해온 김경미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의 <격정의 문장들>은 조선 후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공적 공간을 향해 발화해온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듬는 책이다. 지은이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제기하는 상언(上言), 원정(原情) 등의 기록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의 글들을 발굴해냈다.
조선 후기 이이명의 부인 광산 김씨가 한글로 써서 올린 상언.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갈무리
신임옥사(경종 즉위 뒤 연잉군 왕세제 책봉 문제로 노론과 소론이 충돌한 사건)로 남편과 아들, 사위와 며느리를 한꺼번에 잃는 참혹한 일을 겪은 광산 김씨 부인(1655~1736)이 임금에게 두 차례 상언을 올려 가문을 구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해남 윤씨 집안의 종부 이씨(1804~1863)는 시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규한록’)에서 자신의 입양을 문제 삼는 시집 어른들을 원색적으로 비판하고 종부로서 자신의 온전한 지위를 주장해 끝내 이긴다. 기생 출신 초월은 자신의 남편을 비롯해 당대의 정치·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상소문을 남겼다. 지은이는 조선이란 가부장제 봉건 사회에서 여성들은 유교적 여성의 규범에 철저한 여성상을 체현하는 한편, 이를 통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아냈다고 본다.
근대 계몽기를 거치며 여성의 공적 발화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됐고, 독자투고 등 신문은 그 중요한 장이 됐다. 그 내용은 여성의 교육권을 시작으로, 건강과 몸, 여성 고유의 힘, 열강의 침략 등 국제정세 문제 등을 널리 포괄했다. 여성 투고자들에는 “스스로를 과부, 여노인, 첩, 기생, 소사로 명명한 다양한 여성들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이른바 ‘신여성’보다는 ‘구여성’에 속하면서도 스스로 구여성상을 깨고 있었다. 지은이는 “신문의 자투리 공간을 통해 새로운 여성주의적 주체로 나아간 이 여성들의 목소리는 한국 페미니즘의 초기 형태이자 여성운동의 초기 형태로 주목해야 할 것”이라 평가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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