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있었다
이재무 지음 l 열림원 l 1만1000원
이재무 시인의 신작 시집 <한 사람이 있었다>는 그가 “내 시의 베아트리체”라 일컫는 한 사람에게 바쳐진다.
“어둠이 빠르게 마을의 지붕을 덮어오던/ 그해 겨울 늦은 저녁의 하굣길/ 여학생 하나가 교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음의 솔기가 우두둑 뜯어졌다./ (…) / 한순간 눈빛과 눈빛이 허공에서 만나/ 섬광처럼 길을 밝히고 가뭇없이 사라졌다./ (…) / 말없이 마음의 북 둥둥, 울리며 걷던 십 리 길/ 그날을 떠나온 지 수 세기/ 몸속엔 홍안의 소년 두근두근, 살고 있다”(‘첫사랑’ 부분)
‘수 세기’는 오타일 수도 있지만 시인이 느끼는 아득한 시간의 거리를 강조하려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수 세기 또는 수십 년 세월 저쪽에서 한 번 시인의 가슴에 찍힌 사랑의 낙인은 시간이 지나면서도 지워지거나 흐릿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선연하게 불거진다. “슬프고 높고 외로운 길을 나는/ 숙명처럼 걷고, 달렸다/ 나의 길은 너를 향한 길이었다”(‘나의 길’)고 시인이 고백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그의 베아트리체는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장본인이다.
“최초로 그리움을 심어준 사람// 결락의 고통을 안겨주고// 부재의 허무를 살게 하여// 나를 깊이 만든 사람// 세계가 비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우친 사람// (…) // 모국어와 사랑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시를 쓰게 한 사람”(‘한 사람 1’ 부분)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결락과 부재를 경험하며 깊어질 필요가 있고, 세계의 비밀을 보는 눈을 지녀야 하며, 모국어를 사랑해서 그것을 쓰다듬고 매만질 줄 알아야 한다. 이재무의 베아트리체는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게 시인이 된 그는 “내 노래는 온전히/ 한 사람을 위한 것”(‘노래를 위하여’)이라며 자신의 노래를 그 사람에게 되돌려준다.
그런데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세상 모든 것을 향한 열림으로 나아가는 것이 또한 사랑의 신비와 위대함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한 사람 속에 세계가 있”(‘한 사람 2’)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는 좁은 범주의 사랑으로부터 자신과 그 대상을 함께 풀어놓을 수 있게 된다. 집착과 소유가 아니라 자유와 해방으로서의 사랑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함께 구원에 이르는 형국이다.
“가라, 가서 홀로 빛나는 별이 되어라/ (…) / 한때 내 세계의 전부였던 이여,/ 그러면 안녕!”(‘일몰의 바다’ 부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