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
진런순 지음, 손지봉 옮김 l 서울셀렉션 l 1만5800원
진런순(金仁順)은 중국어로 글을 쓰는 조선족 작가로 현재 지린성 작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2012년 소수민족 문학상인 준마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소설 <춘향>은 우리 고전 춘향전을 새롭게 쓴 작품이다. 한민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동포 작가이면서도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로 쓴데다, 춘향 이야기에 현대적인 시각을 도입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분위기를 풍긴다.
진런순의 <춘향>에는 우리가 아는 춘향전의 주요 인물들이 두루 등장한다. 주인공인 춘향과 이몽룡 그리고 악역인 변학도는 원전과 같은 이름과 신분으로 나온다. 조연급인 춘향 어미 월매와 몸종 향단에 해당하는 인물에서는 적잖은 변화가 보이는데, 특히 춘향 어머니인 ‘향 부인’의 설정에서 이 소설은 원전과 멀찍이 거리를 두게 된다. 푼수데기인가 하면 그악한 현실주의자로 그려진 원전의 월매와 달리 향 부인은 출중한 외모와 도도한 성격, 주체적 세계관을 지닌 인물이다. “여자로서 잘 살고 싶거든 오직 스스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단다”라고 딸에게 조언하는 향 부인의 캐릭터는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소설 <춘향>의 작가인 중국 조선족 소설가 진런순. 서울셀렉션 제공
약사의 외딸로 태어나 자란 향 부인은 아내를 여의고 홀로 딸을 키운 아비가 신선이 되겠다며 산으로 들어간 뒤 단옷날 장에 나갔다가 남원부사의 눈에 띈다.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그 결과로 춘향이 생겨난다. 그러나 임기를 마친 남원부사가 본처가 있는 한성부로 올라가던 중 뱀에 물려 죽은 뒤, 향 부인은 남원부사가 지어 준 저택 ‘향사’를 유곽 삼아 손님을 맞는다. 비록 몸을 파는 처지라고는 해도 향 부인의 비현실적인 미모는 색을 탐하는 남정네들뿐만 아니라 남원부에 사는 이들 모두의 자부심의 근거가 된다. 춘향 아비에 이어 남원부사를 지낸 또 다른 인물이 한성부에 올라가 대군에게 보고하는 이런 말을 들어 보라.
“향 부인 없는 남원부는 색이 없는 천이요, 소금 없는 찬이며, 풀 없는 초원이지요. 향사는 남원부의 무대 같고, 향 부인은 남원부를 새가 지저귀고 꽃향기가 가득한 무릉도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유모의 손에서 자라며 남들처럼 제 엄마를 ‘향 부인’이라 부르는 춘향은 외할아버지가 남긴 의약서를 독학하며 약을 짓는 능력을 터득한다. 춘향 아비였던 남원부사의 본처가 주입한 독에 쓰러진 향 부인을 제가 처방한 약으로 살려내는가 하면, 향사의 서당 훈장인 봉주 선생이 죽을병에 걸리자 역시 제 나름의 처방으로 치료할 정도. 그런 춘향이 기억을 잃게 만드는 물약 ‘오색’을 만드는 소설 중반부의 설정은 결말부의 대단원을 위한 복선으로 구실한다.
원작의 향단에 해당하는 인물이 이 작품에서는 ‘소단’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도둑의 딸이었던 소단은 향 부인에게 거두어져 향사에서 춘향과 함께 성장한다. 기생의 아들로 소단과 마찬가지로 춘향 또래인 ‘김수’ 역시 향사에서 성장하지만, 그는 나중에 절에 들어가 탁발승이 된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듯이 짐승도 생명이 있고, 뜰의 꽃 하나 풀 하나 나무 하나 전부 생명이 있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에 둘러싸여 친척이나 친구처럼 살고 있는데 그들에게 비유하는 것이 어떻게 실례일 수 있겠습니까?”
향사를 지키는 개들을 물리치느라 춘향이 이몽룡의 몸에 약수를 발라주자, 몽룡은 제 코로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는데 개들이 그 냄새를 분간하는 것을 신통하게 여긴다. 몽룡에게 개코가 있었다면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춘향의 말에 몽룡이, 감히 자기를 짐승에게 견주냐며 발끈하자 춘향이 그를 반박하며 하는 말이다. 어려서부터 풀과 꽃을 식솔처럼 챙겼고 그것들의 속성을 헤아려 온갖 약재로 삼았던 춘향의 생태주의적 면모를 알게 한다.
춘향은 열여덟 번째 생일이기도 한 단옷날 역시 장마당에 나갔다가 새로운 남원부사의 아들 몽룡을 만난다. 자신을 향 부인으로 착각하는 몽룡에게 “네가 잘못 알고 있어”라고 말할 정도로 춘향 역시 제 어미만큼이나 미모가 출중하고 도도하다. 그네를 타던 춘향의 미모가 남원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는 것은 원작과 같다 하겠는데, 말 탄 행렬을 피하느라 벗겨진 춘향의 신발이 춘향과 몽룡을 이어 준다는 설정에서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흔적도 보인다.
원작에서처럼 몽룡의 아버지인 남원부사가 더 높은 관직을 맡게 되고 몽룡 자신도 과거에 응시하고자 한성부로 올라간 뒤, 변학도가 새로운 남원부사로 부임해 온다. “원래 조정의 전옥서에서 죄인의 심문을 책임지는 관리였”던 변학도는 청백리를 자부하지만, 없는 범죄 혐의로 향 부인을 겁박하며 춘향을 제 배필로 줄 것을 강요하는 데에서는 원작과 다름없는 탐관오리의 면모를 보인다. 향 부인은 눈먼 판소리 광대 ‘태강’과, 지금으로 치면 소설가에 해당하는 패담 작가들로 하여금 춘향과 이몽룡과 변학도의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게 하는 것으로 변학도의 겁박에 맞서는데, 남원부는 물론 멀리 한성부와 개성에서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는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가의 내용에 부합한다.
물론 진런순의 <춘향>은 우리가 아는 춘향가와는 다른 결말을 지녔다. 소설 말미에서 암행어사가 된 몽룡과 춘향이 재회하는 것까지는 원작과 같지만, 두 사람은 원작에서처럼 두고두고 행복하게 잘 살게 되지는 않는다. 몽룡은 세간에 떠도는 춘향가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춘향의 마음을 떠 보는데, 춘향의 반응은 호의적인 듯하면서도 매몰차다. “나리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저에게는 모두 봄바람을 맞는 것 같고 아름다운 술을 마시는 것 같답니다.”
살아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설이 되어 저잣거리를 떠돈다는 설정이 재미지다. 특히 패담 작가들에게 춘향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들의 창작욕을 북돋우던 소단이 그 일에 관해 춘향에게 하는 말은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춘향 아씨는 이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지금처럼 젊을 수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