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전주 동네책방 잘익은언어들 책방지기 이지선(왼쪽)씨와 단골손님이자 ‘다독왕’ 김동옥(오른쪽)씨가 잘익은언어들에서 열린 ‘동옥서재전’을 소개하고 있다.
전북 전주시 인후동에 위치한 동네책방 ‘잘익은언어들’에서는 1월 한달 동안 독특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같은 신간들에서부터 허수경 시인의 시집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김남주 평전, 다양한 그림책 등 가지각색의 책 140여권이 놓인 전시대 위에 걸린 것은 ‘동옥서재전’이라 쓰인 펼침막. 이 서점의 단골손님이자 ‘다독왕’인 김동옥(54)씨가 2022년 한해 동안 읽은 책들을 모아, 책을 읽으며 적어둔 독서노트 등과 함께 전시하는 행사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동네책방에는 늘 독서모임, 공연, 북토크 등 행사가 끊이지 않지만, 독자의 서재를 전시하는 행사는 그중에서도 새롭다.
지난 18일 이곳에서 만난 김씨는 “꼽아보니 지난해 전부 209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 가운데 직접 사서 읽은 책 142권을 이곳에 전시했다. 원래도 많이 읽었는데 코로나 시국을 맞이하며 한해 읽는 책이 100권을 넘기게 됐다”고 말했다. 전업주부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언제부턴가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과 자신의 감상을 적는 방식으로 독서노트를 쓰는 습관을 들였다고 한다. 자신이 산 모든 책 첫 장을 메모지와 스티커로 예쁘게 꾸미고, 그곳에도 책을 접하게 된 계기나 감상을 짤막하게 적어두기도 한다. 아이들을 다 키워낸 터라, 요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에도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다고.
전주 동네책방 잘익은언어들에서 열리고 있는 ‘동옥서재전’의 모습.
‘다독왕’ 김동옥씨가 지난해 읽은 209권 가운데 3권을 추린 ‘베스트 3’를 소개하고 있다.
‘다독왕’ 김동옥씨가 자신이 작성해온 독서노트를 펴서 보여주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자신이 읽은 책 가운데 ‘베스트 3’를 꼽았고, 서점에선 그의 감상을 담아 쓴 편지를 넣어 이 책들을 팔고 있다. 중증장애아를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 <마이 스트레인지 보이>(에트르), 1960년대 스웨덴 여성 청소노동자의 일기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교유서가),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를 소재로 한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등이다. 김씨는 “<마이 스트레인지 보이>는 고통이 닥쳤을 때 이를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태도,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는 개인적인 기록에도 시대를 담을 수 있다는 깨달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부모님의 인생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 등을 갖게 했다.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꼽았다”고 말했다. ‘베스트 3’에 꼽지 못해 아쉬웠던 책들로는, 20대 남성 시인 최백규의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창비), 청년 용접공 천현우의 <쇳밥일지>(문학동네), 정서적으로 깊이 공감한 이주혜 작가의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에트르) 등을 꼽았다.
불특정 다수에게 이렇게 자신의 서재를 공개하게 된 것은 순전히 동네책방과의 만남 덕이다. 과거 주로 인터넷서점을 이용했던 김씨는 2018년 가을께부터 전주 시내에 동네책방들이 있다는 걸 알았고, 특히 한 동네에 있던 잘익은언어들에는 아예 화요일마다 규칙적으로 ‘출근’할 정도로 단골이 됐다. 책방지기 이지선(48)씨와는 서로 할 얘기가 끊이지 않아 집에 갈 때에는 배웅까지 해줄 정도로 친해졌다고. 평소 김씨의 남다른 독서량과 책 꾸미는 정성과 실력 등을 눈여겨봤던 이씨가 2020년 김씨에게 ‘단골손님의 책 전시’를 해보자고 제안했던 것이 올해로 3년째에 이르게 됐다. 이씨는 “비수기(1~2월)를 맞아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는데, 김 선생님이 추천한 책들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반응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책방에 처음 오시는 분들도 ‘이게 뭐냐’며 감탄을 하시더라고요.” 책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이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지에도 관심이 있기 마련이라 짐작할 뿐이란다. 실제로 이날 소식을 듣고 세종시에서 전주까지 찾아왔다는 젊은 여성이 김씨와 독서노트 작성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김동옥씨는 <마이 스트레인지 보이>,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 <아버지의 해방일지> 3권을 ‘베스트 3’로 꼽았고, 서점에서는 김씨의 편지를 담아 이 책들을 판매하고 있다.
‘동옥서재전’의 기획 취지를 밝힌 팻말과 김씨의 독서노트 등을 전시해둔 모습.
‘동옥서재전’의 기획 취지를 밝힌 팻말과 김씨의 독서노트 등을 전시해둔 모습.
‘동옥서재전’의 기획 취지를 밝힌 팻말과 김씨의 독서노트 등을 전시해둔 모습.
올해로 동네책방 책방지기 8년차에 접어든 이씨는 “동네책방에는 큐레이션도 개성 있는 공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전부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책방을 찾는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책방뎐>이란 책도 써낸 바 있다. 큰 출판사들이 유행처럼 내놓는 ‘동네책방 에디션’에 대해 “공급률 차이도 없고 무조건 10부 이상을 들여와야 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고 손님들의 반응도 시큰둥하다”며 쓴소리를 던지기도 했다. 김씨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의 즐거움을 강조했다. “인터넷서점을 이용할 땐 제가 좋아하는 책들만 접할 수 있었는데, 동네책방에서는 책방지기의 ‘취향’에 따라 추천하는 책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책방마다 그 취향들이 뚜렷하게 다르기도 하고요. 다른 손님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죠.”
출판계에 하고픈 이야기를 묻자, 김씨는 “요새 ‘잘 읽히는 책’들만 많이 나오는 반면 쉽게 읽히지 않는 책들은 소외되는 풍토가 있는 것 같다”며 “많이는 팔리지 않더라도 출판사만의 애정과 신념, 소명이 담긴 책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취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새롭게 발견하게 된, “에트르, 1984북스, 시간의흐름처럼 작지만 취향과 철학이 확고한 출판사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베스트 3’로 꼽은 책들 가운데 인상 깊었던 구절로는 “삶의 작은 순간에 왜 상냥할 수 없는 것일까”(<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 “사람이 오죽하면 글겄냐’(<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을 꼽았다. “하찮게 여겨지는 일상 속 순간에도 상냥할 수 있다면, 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해 ‘오죽하면’이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제가 책을 읽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는 이유랍니다.”
전주/글·사진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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