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아폴로 8호 승무원들이 달 궤도를 돌면서 찍은 ‘지구돋이’ 사진. 우주에서 찍은 최초의 지구 사진이다. 현암사 제공
변화의 세기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l 현암사 l 2만8000원
어떤 것의 상태가 바뀌는 것을 변화라 이른다. 변화를 포착함으로써 우리는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선다. 인류의 역사라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을 만치 거창한 것을 궁구하고자 한다면 ‘무엇이 바뀌었는가’ 묻는 방법이 더욱 유용할 것이다. “역사란 (…) 한 종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모조리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이언 모티머는 <변화의 세기>(원저 2014년 출간)에서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구의 역사를 각 세기별로 톺아보며, 세기마다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파고든다. 지은이는 시대순으로 10개의 세기를 하나씩 분석하고, 끝에 가서는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는가’ 종합 평가를 내린다. 세기마다 ‘변화의 주체’를 꼽기도 한다. 지은이의 작업은 “서구 문화권”에만 초점을 맞췄으며, 그 시작점도 기독교 세계를 바탕으로 서구 문화권이 형성된 이후인 11세기로 삼았다. 또 어떤 일의 기원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력을 변화의 기준으로 삼았다. 내연기관은 19세기에 발명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20세기에 발휘되었으므로 20세기의 변화로 보는 식이다.
11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로는 “서유럽 대부분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꼽는다. “기독교 국가들끼리 상호 신뢰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도덕 체계”를 제공한 교회가 일반 대중의 삶까지 좌지우지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됐고, 이는 폭력을 통제하는 봉건 체제의 형성, 축성 등 새로운 건축술의 발전, 노예제 폐지의 시작 등으로 이어졌다.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의 권위를 세속 황제 위로 올린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변화의 주체로 꼽혔다.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의 세계 지도 ‘세계의 무대’(1570). 메르카토르 도법을 이용하여 제작된 지도들 가운데 최초로 인쇄된 이 지도는 15~16세기에 얼마나 많은 ‘발견’이 있었는지 보여준다. 현암사 제공
테니스 코트의 서약, 자크루이 다비드의 미완성 스케치를 본뜬 그림. 1789년 6월20일 프랑스 국민 의회 의원들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민 의회를 해산하지 않기로 한 이 맹세는 프랑스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현암사 제공
토머스 알롬의 1834년 작품 속에서 그려진 동력 방직기의 모습. 현암사 제공
12세기라 하면 사슬갑옷을 입은 십자군이 철퇴를 휘둘러 적의 투구를 부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세기 “변화의 진정한 중심지는 토지였으며, 변화의 주역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근면성실한 농부들”이었다 한다. 중세 온난기 아래 진행된 대규모 개간이 인구 증가를 이끌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재발견 같은 지적 르네상스 등도 이로부터 가능했다. 이런 식으로 지은이는 상업과 무역이 발전한 13세기, 흑사병이란 희대의 재앙 아래에서도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되레 민족주의가 싹튼 14세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등 세계와 ‘자아’에 대해 눈뜬 15세기, 세계의 확장과 더불어 성경의 현지어 출판 등 ‘읽고 쓸 줄 아는 사회’로 나아간 16세기, 과학적 합리성이 부상한 17세기 등을 분석해 나간다. 18세기에는 운송망의 발전, 농업혁명, 자유주의와 경제이론의 발전, 산업혁명,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 같은 정치혁명 등이 일어났다.
19세기와 20세기는 1000년의 역사 가운데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세기별 전체 인구가 경험한 시간을 수치화한다면 전체의 절반에 가까워질 정도로 급격한 변화들을 겪은 시기다. 인구 증가가 도시화를 불렀고, 도시화는 산업과 운송을 성장시켰다. 그리고 성장한 산업과 운송은 또다시 인구 증가와 도시화, 전문화 등을 불렀다. 19세기에는 혁명을 두려워한 정부가 앞장서게 된 사회 개혁이, 20세기에는 세계화, 대량 살상의 위험, 지속 불가능한 생활수준에의 도달 등이 변화의 핵심에 있었다.
지은이의 통찰은 ‘문명화 곡선’으로 압축된다. 인간 문명의 변화는 길게 잡아 늘인 에스(S), 곧 초반에는 완만한 기울기로 상승하다가 중반부터 그 기울기가 급격히 상승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기울기가 수평에 가깝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변화는 천천히 도입되어 어느 순간 급격하게 퍼져나가지만 사회 전체에 적용되면 더 이상 변화하지 않고 굳어지는 단계로 접어든다. 여기엔 또 다른 역설이 있으니, “변하지 않는 것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변화가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또 다른 변화를 강요받게 된다. 기초적인 생명 유지에서부터 사회적 풍요까지 필요를 여덟 단계로 나눠 종합한 결과를 보면, 지난 1000년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보인 세기로 20세기가 꼽혔다. 책을 관통하는 진정한 문제의식은 끄트머리인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서구 사람들의 거의 모든 필요는 충족되었는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에서 공급될 수 있는가?
1945년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에 촬영된 나가사키 시 폐허 속 나가이 박사의 모습. 현암사 제공
필요의 각 단계별로 변화가 컸던 세기들의 순위
지은이는 1968년 아폴로 8호 우주비행사들이 최초로 지구의 모습을 담았던 ‘지구돋이’ 사진을 들이민다. 이 사진은 여태껏 당연하게 여겼던 무한한 자원이란 없으며 오직 이 작은 행성만이 우리가 가진 전부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경계를 부수는 변화를 통해 끝없이 커져가는 필요를 충족해온 것이 지난 1000년 서구의 역사다. 특히 19·20세기에 우리가 경험한 진보(라 여겼던 변화)는 “뜻밖의 횡재에 가까운, 비정상적인 에너지 소비”에 기대어 이뤄졌다. 한계 앞에 선 우리에겐 생활수준의 전반적 하향화 등 1800년에 가까운 어느 지점으로 후퇴할 일만 남았다. 제한된 자원을 두고 벌어질 경쟁 속에서 부자들의 욕망이 나머지 인구의 필요보다 먼저 충족되지만, 부자들의 배타성은 부에 비례하여 늘어날 것이다. 자본주의와 과두정이 자유주의를 집어삼키고 사람들은 “더 계급화되고 덜 자유로워질 것이다.” 한마디로 “인류는 결코 미래에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갖지 못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화석 연료 고갈에 성공적으로 대응하여 그나마 지속 가능한 미래를 이어가느냐, 아니면 살던 대로 살다가 고통스럽게 전지구적 위기를 맞이하느냐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다. 구체적이어서 더 우울한 전망들을 늘어놓던 지은이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점, 그리고 인류의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점 등을 들어 미래를 낙관한다. 아울러 길고 긴 인간의 역사 속에서 ‘변하지 않은 것들’에 기대어보자고 제안한다. 사랑, 아름다움, 농담 따먹기, 웃음소리 같은… “꿈꿀 만한 가치가 있는, (…) 그리고 값을 매길 수 없는” 모든 것들 말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