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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반세기 번역이론가의 ‘그 번역은 틀렸소’

등록 2023-01-27 05:01수정 2023-01-27 09:34

영문학자 김욱동의 이론과 실재

김영하 작가 <위대한 개츠비> 등
오역 짚어 번역 원칙·자질 논해

“세계문학 대세…번역도 변해야”

번역가의 길
김욱동 지음 l 연암서가 l 1만7000원

번역은 이를테면 사기다. 서로 다른 두 언어가 교환될 때 의미가 옹근 같은 말은 존재하지 않고, 그럼에도 번역자는 시와 소설까지 결락 없다는 듯 바꿔내기 때문이다. (그러고선 일례로 정지용의 시 ‘비로봉2’의 “흰돌이 우놋다”를 ‘cry’ 대신 “laugh”로 잘못 옮겨, 울던 돌은 돌연 웃는 돌이 되어버린다.) 언어 결정론자였던 독일의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가 ‘번역 불가론’을 내세운 까닭인데, 이에 국내 대표적 번역이론 학자이자 번역가인 김욱동 명예교수(서강대 영문학)가 덧붙인 지론은 이러하다. “번역에서 ‘등가의 무게’를 주장한다는 것은 언어의 속성에서 보면 마치 무지개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한낱 부질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번역의 숙명에 관한 성찰에 궁극의 번역을 좇는 역자들의 순정과 노고에 대한 애정이 담길지언정, 무지나 의도에서 초래된 숱한 오역이 위로받을 여지는 없다. 번역의 원칙과 자질을 논하기 위해 김 교수가 든 오역과 졸역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고전 명작도 예외가 아니다. <위대한 캐츠비>(피츠제럴드)에서 화자 닉은 여성 골퍼 조던을 만나 연애 감정을 느끼며 “I knew that first I had to get myself definitely out of that tangle back home”이라 구술한다. 근자에 과잉번역 등으로 논란이 된 역서(초판)엔 “나는 우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 자신을 구출해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로 되어 있지만, 번역가로도 이름 난-게다 피츠제럴드를 스승으로 여겼던-무라카미 하루키는 ‘고향에 남겨두고 온 굴레(しがらみ)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 정도로 옮겼다. 여기서 얽매임 내지 속박을 뜻하는 しがらみ(柵, 시가라미)는 일어에서 ‘사랑의 굴레’(こいの柵)란 관용구로도 사용되기에 일어 독자들은 새 여성과의 관계를 위해 고향에서의 연애를 지워야 한다는 닉의 속내를 전달받는 반면, 한국 독자는 그렇지 못하다.

김 교수는 그 밖의 여러 사례를 들며 “피츠제럴드 특유의 간결체 문장에 찬물을 끼얹는 번역”이라거나 “원천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뿐더러 목표어인 모국어 구사력도 그다지 신통치 않다”고 비판한다. 다만 책에 역자가 호명되진 않는다. 25일 <한겨레>에 밝힌바 “역자를 비판하려는 게 책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작가 김영하의 번역본(문학동네)에 대한 논고로, 2010년대 초반 논쟁 당시 또 다른 당사자라 할 김 교수로선 사실상 처음 공식 발언한 셈이다. 2023년 김영하의 <위대한 개츠비>는 “지금까지 많은 번역본들은 소설의 ‘위대함’에 압도된 나머지, 인물들이 지닌 결점을 적확히 그려내지 못했다. 인물들의 철없는 행동은 우리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순화되었고 이기적인 의도는 그 맥락이 증발해버리고 말았다”고 여전히 강조하고 있으니, 과거 이 작품을 번역(민음사)했던 김 교수를 포함해 일군의 ‘정본 논쟁’은 진행 중이라 하겠다.

김욱동 서강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연암서가 제공
김욱동 서강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연암서가 제공

게다 소수언어로서의 한국문학이 국외로 소개될수록 ‘역자의 개입’이 어디까지 타당한지 갈등은 끊일 수 없다. 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역본(데버러 스미스 옮김)이 오역과 ‘창작 수준의 번역’ 논란에 휩싸인 게 2016~17년이다.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의 저 유명한 독백은 아시아에 소개된 지 150년이 되도록 번역의 순도 투쟁을 거듭하고 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국내 최초로 ‘햄릿’을 소개한 장덕수의 “살까 죽을까 하는 것이 문제로다”(1915), 전편을 최초 번역한 현철의 “죽음인가 삶인가, 이것이 의문이다”(1921~22)를 지나 설정식에 의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1949)로 옮겨진 뒤에도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최재서, 1954),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구나”(여석기, 1964)에서 1980~90년대 “존재냐, 비존재냐-그것이 문제다”(이상섭),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최종철), 최근의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설준규, 2016년)로까지 실로 다양한 번역적 사유가 부닥치고 전개된다. 이는 1874년 일본에 <햄릿>이 처음 소개된 이래 노정된 일역의 흐름이거니와 국내에 영향 미친 탓도 크다.

시와 소설이 그러할진대, 번역이야말로 기존의 번역이 미치는 영향은 강력할 수밖에 없다. 위 사례에서 김 교수는 설정식의 버전을 두고 국어 연어법(물불, 여기저기 등 긴밀하게 짝을 이뤄 만든 의미 단위) 등에 있어 죽음을 먼저 호명한 것이 자연스럽고, 감탄조가 더해진 사실을 강조하는데, 죽음은 현철이, 감탄조는 장덕수가 이미 사용했다.

김 교수는 ‘독창적 상상력을 선취한 선배 시인으로부터의 영향력에 대한 불안감이 시의 창조 원동력이 된다’는 20세기 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지적을 언급하며 “후배 시인들과 선배 시인들이 펼치는 갈등과 투쟁의 미학”이 문학임에 동의하는데, 번역도 다르지 않다. 또 다른 창조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순도 내지 미학의 투쟁에서도 양보 못 할 교리가 김 교수에겐 있어 보인다. 정확성이 첫째, 가독성이 둘째라는 점. 때문에 후대 번역가가 독창성을 내세워 결국 오역까지 범하게 될 공산을 지은이는 ‘독창성의 오류’라는 말로 엄히 경계한다.

궁극의 번역을 향한 길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옮김’의 질이 다를 순 없겠다. 서로 다른 언어의 무게를 ‘옳게 매김’이요, 그 무게의 언어를 옮기고자 스스로 평생 ‘짊어맴’이랄까.

책엔 서구 최초의 번역이론가로 평가받는 16세기 프랑스 인문학자 에티엔 돌레가 등장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프랑스어로 옮기며 인간의 죽음 뒤 존재를 논하는 대목에서 “아무것도 없다”고 썼다. 원서에 없는 역자의 개입으로, 기독교적 영생을 불신하는 신성모독의 번역이라며 화형당한다. 돌레가 결과적으로 목숨과도 바꿨던 번역 원칙 다섯 가지는 이렇다. ①원저자의 의미와 자료에 대한 완벽한 이해, ②원천어와 목표어에 대한 완벽한 지식. ③낱말 대 낱말 번역의 회피 ④라틴어 표현의 회피. ⑤적절한 낱말의 결합과 연결.

젠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까지 필수로 요구되는 시대다. be동사가 있는 인도유럽어에선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 될 게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시기 어느 번역도 단지 ‘기술’일 수 없다는 언어 문학의 본질이 김 교수의 반세기 경험과 연구로 웅변된다. 그러니 좋은 번역은 사기도 이만저만 사기가 아니다. “작가들은 민족문학을 만들어내지만 번역가들은 세계문학을 만들어낸다”(주제 사라마구)질 않는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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