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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브레멘음악대, 최고는 ‘한스 피셔’ 판본

등록 2023-02-10 05:00수정 2023-02-10 11:02

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

브레멘 음악대
그림 형제 글, 한스 피셔 그림, 문성원 옮김 l 시공주니어(1996)

독서교실 장식품 중에 패브릭 액자가 있다. 어두운 바탕에 네 동물의 눈만 반짝이는 그림으로, 어린이들은 <브레멘 음악대> 한 장면인 걸 금방 알아차린다. 그림책뿐 아니라 뮤지컬도 보았다는 어린이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브레멘’에 가 보았다고 자랑하는데, 반응은 매번 신통치 않다. 나는 묻지도 않은 여행담을 늘어놓는다. “항구 도시였어. 광장 한쪽에서 어떤 사람이 바이올린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어. 음악대의 도시라서 그런가 봐. 그리고 동물 음악대 동상이 있더라고! 기념품 가게에서는 엽서 가방 인형 책 뭐든지 동물 음악대가 담긴 걸 팔아. 꼭 성지에 온 것 같았어. 이것도 그때 산 건데….” 어린이가 묻는다. “근데 성지가 뭐예요?” 그림책이 재미있으면 됐지 브레멘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모양이다.

어렸을 때부터 <브레멘 음악대>를 좋아했다. 지금도 그림 형제 동화 중 제일 좋다. 오랜 세월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바로 그 주인에게 배신당한 동물들이 보란듯이 성공하는 이야기. 전개상 이들은 도망을 치는 것이지만, 나는 무정한 주인 따위는 버리고 익숙한 공간을 박차고 나서는 것이라고 본다. 게다가 음악대에 들어가는 게 목표라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겠다는 선언 아닌가. 동물들이 힘을 합쳐 어리석은 도둑들을 몰아내고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결말도 마음에 든다. 큰 용기를 낸 동물들에게 합당한 보상이다.

그림 형제의 많은 동화들이 그렇듯이 <브레멘 음악대>도 여러 작가들이 그림책 작업을 했다. 당나귀의 제안에 개와 고양이, 수탉이 차례차례 대열에 합류하는 구조는 어린이 독자가 이해하기 쉽다. ‘동물 음악대’라는 설정만으로도 신이 난다. 도둑들을 놀라게 하는 요란한 장면도 있다. 내가 그림책 작가라고 해도 그려보고 싶을 것 같다.

그동안 되는 대로 여러 작가의 책을 구해 보았는데 최고는 한스 피셔의 <브레멘 음악대>다. 배경을 생략하고 흰 바탕에 동물들만 그린 연출이 과감하다. 윤곽은 펜으로 단번에 그린 듯 속도감이 있다. 거기에 원색을 중심으로 밝은색을 입혀서 책을 보는 마음마저 환해진다. 특히 한탄과 짜증, 기대, 만족이 스쳐 가는 고양이의 표정이 일품이다. 몇 번이나 따라 그려보았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림책이라는 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예술 작품이라는 게 새삼 기쁘다.

고백하자면 나의 브레멘 여행은 좀 쓸쓸했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이야기의 배경이 된 도시를 찾아 먼 길을 수고롭게 다녀오는 멋’을 내려고 일행도 없이 혼자 움직였는데 하필 그날 비바람이 거셌다. 거리 풍경이 황량해서 사진도 별로 못 찍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동물들은 브레멘에 가지 않고 중간에 구한 집에 정착했는데, 나는 왜 굳이 거기까지 갔나 싶어 웃음이 났다. 브레멘보다 <브레멘 음악대>가 좋다. 현실보다 좋은 게 그림책에 있어서 그림책을 보고, 덕분에 현실을 사는 것 같다.

김소영/독서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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