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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가해자는 감형 구매, 피해자는 자격 증명

등록 2023-02-10 05:01수정 2023-02-10 09:40

성폭력 사건 ‘법시장화’ 파고든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가해자 전담서비스 성황 등 개인에게 내맡겨진 성폭력
사법 시스템, “분석·개입할 수 있도록 전환 필요”
그래픽 장은영 soobin35@hani.co.kr, 클립아트코리아
그래픽 장은영 soobin35@hani.co.kr, 클립아트코리아

시장으로 간 성폭력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
김보화 지음 l 휴머니스트 l 2만1000원

포털 사이트에 ‘성폭력’을 검색해보면 수많은 광고·홍보 콘텐츠들이 뜬다. ‘성폭력 전담변호사’ ‘특화 티에프팀 구성’ ‘압도적 무혐의 승소 사례 다수’ 등 대부분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법적으로 ‘전담’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을 내세운다. 전담법인을 자처하는 사이트에선 ‘특화된 전문가’로서 자신들이 어떻게 무혐의·불송치·기소유예 등을 이끌어냈는지를 ‘성공 사례’로 제시한다. ‘억울함을 해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위의 의뢰인 후기도 달려 있다. 바야흐로 “가해자 중심의 성범죄 전담법인”의 전성시대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은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 ‘법시장’에 의존하게 된 현실을 비판하고, 그 배경을 깊숙이 따져보는 책이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인 지은이 김보화가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해서 단행본으로 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고·명예훼손 등 ‘역고소’가 빈번하게 제기되는 데 의문을 품었던 지은이는, 가해자에게 전문적인 법적 서비스를 해주는 ‘시장’의 존재를 인식한 뒤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 여성운동단체 활동가, 변호사 등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고, 판결문과 법적 자료, 온라인 등의 매체에 드러난 담론을 분석해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성폭력 사건에서 법이 가해자 쪽으로 기우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지은이는 최근 ‘법시장화’라 부를 만한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본다. 여성운동은 성폭력에 대해 전반적인 공적인 제도 강화를 요구해왔지만 국가는 가해자 처벌 등 ‘엄벌주의’만을 강화해왔고, 이는 사법적 처리에 대한 의존도를 갈수록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사건에 견줘 성폭력 사건은 “현실과 괴리된 최협의설과 관행화된 감형,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신뢰하지 않는 통념, 무고에 대한 의심, 재판부에 따라 결과에 큰 차이가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사건이 늘어나는 가운데, 법무법인이 개입해서 장사를 해볼 여지가 많은 영역인 셈이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성희롱·성폭력을 둘러싼 폭력적 구조와 치유 회복의 의미, 조직 내 성차별적 문화 등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들이 축소되고, 사건 해결의 절차와 내용이 사법화”되었다고 진단한다. 근원적 배경으로 “성별권력과 위계적·차별적 사회구조”는 다루지 않고 이를 법정 속 개인들 사이의 다툼으로 치환시키는 국가의 ‘신자유주의 통치 전략’을 짚어낸다.

강력범죄의 발생과 기소율, 구속률 현황. 성폭력 범죄의 경우 발생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지만 다른 범죄에 견줘 기소율, 구속률이 낮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강력범죄의 발생과 기소율, 구속률 현황. 성폭력 범죄의 경우 발생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지만 다른 범죄에 견줘 기소율, 구속률이 낮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전담법인들의 ‘감형’ 전략은 실로 다양하다. 무죄를 주장하기 어려울 때, 이들은 ‘처벌불원’ ‘사회적 유대관계 분명’ ‘진지한 반성’ 등 모호하고 추상적인 성범죄 양형기준, 집행유예 기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정중한 태도로 사과한 뒤 합의를 요구해 ‘처벌불원’을 이끌어내고, 사회봉사단체·여성단체 등에 후원금을 낸 영수증을 ‘진지한 반성’의 증거로 제출한다. 헌혈, 직장에서의 해고, 가족 부양, 정신과 치료, 음주 치료, 고도비만에 대한 외모 콤플렉스, 가족과 주변인들의 선처 요구 등이 ‘사회적 유대관계 분명’의 증거로 제시된다. 법원은 이를 기계적으로 받아준다. 무죄를 주장할 대목이 있으면 피해자의 일상을 낱낱이 파헤쳐 ‘서로 좋아서 한 일’로 몰아가는데, 이는 설사 재판에서 지더라도 의뢰인의 만족을 사는 전략이 된다. 가해자들을 모으는 온라인 커뮤니티 운영, 심리상담소·진술분석센터 같은 전문 역량도 동원한다. 예컨대 사설 진술분석센터에 1천만원을 주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보고서를 받아내 재판부에 제출할 수 있고, 이런 전략이 실제로도 먹힌다.

문제는 이런 ‘법시장화’ 아래에 성폭력이 ‘정치적인 것’에서 벗어나 ‘경제적인 것’으로 재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원래 성폭력의 법적 해결 과정은 성폭력이 발생하는 기반인 성별권력, 그리고 그것을 용인하고 사소화하는 남성중심적 사회를 문제화하는 정치적인 장이었다. 여성운동이 그동안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단지 개인의 차원보다 권력과 구조의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해온 배경이다. 그러나 법시장화는 성폭력 사건을 개인 간의 싸움, 더욱이 자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경제적인 장으로 만들고, 정치적인 장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공공성, 윤리, 책임의 가치를 삭제”해버린다. 가해자는 형편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법적 서비스를 구매하는 합리적 소비자가 되고, 그중 ‘억울함’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탈범죄화된 가해자 남성성’이 만들어진다.

성범죄 전담법인들이 내세우고 있는 ‘성공 사례’의 대표적인 구성과 내용. 휴머니스트 제공
성범죄 전담법인들이 내세우고 있는 ‘성공 사례’의 대표적인 구성과 내용. 휴머니스트 제공

법시장화 아래에서 피해자 정체성 역시 재구성되는데, 지은이가 ‘재피해자화’라고 규정하는 이 현상이야말로 책의 알짬이다. 그동안 여성운동은 ‘피해자가 성폭력을 유발했다’ 등의 인식에 맞서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을 발전시켜왔고, 이는 최근 관련 사건 판결문에도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지은이는 최근 법원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해자와의 사회적 지위 차이에서 비롯된 모든 맥락이나 향후 불이익, 생존의 문제, 사회적 비난 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절대 능력으로 미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위계적 권력구조 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왜 참았는지” “왜 당당하게 말 못 했는지” “술 먹고 추근덕거리면 내비두고 가지 (왜 데려다주었는지)” 등 성적 자기결정권을 이미 피해자에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은’ 책임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위험 관리의 개인화”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통치 전략에서 비롯한다고도 지적한다.

지은이는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공공성을 중심에 두고 다층적으로 고민되어야 하며, 사법적 해결은 “좀 더 피해자 중심적인 하나의 선택지가 되어야 하는 동시에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되고 개입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조윤리와 공공변호인제도 강화, 성폭력 역고소 수사와 판단 과정에서 고소권 남용을 막는 ‘적극적 조치’ 도입,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재판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조직 및 공동체 내부의 변화 등 실천적인 제언들도 내놓았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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