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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불투명한 심연 속으로 뛰어들어라

등록 2023-02-17 05:00수정 2023-02-17 10:14

불투명성의 현상학
조광제 지음 l 그린비 l 1만9800원

철학자 조광제가 일고여덟 살쯤, 그의 집 뒷마당엔 우물이 있었다. 어린 그에게 우물은 바닥이 없는 무한정한 깊이를 지닌 것이었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우물 안 물의 표면이 하얗게 빛나다 어느덧 온통 검게 변했다. 그럴 때면 무서운 마음에 들여다보기를 그쳤다. 그럼에도 다음날이 되면 그는 우물 안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불투명성의 현상학>은 철학아카데미 설립자이자 운영위원인 조광제가 주요 학자들의 현상학에서 현상학적 존재론의 바탕으로 삼은 근본 체험이 바로 ‘존재의 불투명성’이었음을 밝히려는 책이다. 이 책 1부에선 불투명한 심연의 존재에 관한 필자 나름의 사유를, 2부에선 후설·하이데거·메를로퐁티·데리다 등 현상학자 8인의 사유에서 불투명성이 근본 토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조광제는 자신이 경험한 우물처럼 존재에는 근본적으로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불투명한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고 본다. 불투명한 존재의 심연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동시에 인간은 그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목숨을 걸고 존재의 심연을 향해 뛰어들 때 사유가 아닌 사유, 사유를 넘어선 또 다른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아이. DALL·E 2로 생성한 이미지. OPEN AI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아이. DALL·E 2로 생성한 이미지. OPEN AI

인간의 불투명성을 향한 존재론적 충동의 반대편에는 지극히 명증함을 향해 가려는 충동 또한 존재한다. 데카르트 이후 300년에 걸친 서구 근대 사상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런 명증성의 마지막에서 벽에 부딪히고 마는 것이 있다. 바로 감각 사물이다. 감각 사물은 주체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사물도, 주체의 관념의 결과물만도 아닌 더없이 불투명한 것이다. 이성은 불투명한 심연의 형태로 나타나는 존재의 현존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존재의 본질을 전혀 알 수 없으며, 본질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감각 사물은 주체와 객체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사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의 근원성을 파기해버린다. 이러한 감각 사물을 사유할수록 인식 자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존재의 심연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이처럼 우리의 존재와 삶은 근원적으로 감각 사물이 가져다주는 강렬한 힘에 휩쓸리고 있다. 이런 삶의 근원적 불투명성은 오히려 인간과 세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불투명성을 극복하기보다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사유하는 것이다.

“요컨대 근원적으로 불투명한 삶을 견뎌 내는 것은 우리가 겪는 인고가 아니라, 알고 보면 우리가 존재자 전체를 포섭하면서 그 전체의 밑바탕에서 움터 나오는 시적인 의미를 끌어들여 보호함으로써 나의 존재를 저 불투명한 심연을 품은 존재에게로 넘겨주고 아울러 저 존재를 나의 존재로 넘겨받는 상호교환적인 거대한 작업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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