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본대한민국민단 소속 재일동포 2천여명이 2001년 6월5일 일본 도쿄 시내 히비야 공원에서 재일 외국인 영주권자들에게 지방선거 참정권을 허용할 것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도쿄(일본)/연합뉴스
공생을 향하여
자이니치와 함께 걸어온 반세기
다나카 히로시·나카무라 일성 지음, 길윤형 옮김 l 생각의힘 l 2만2000원
다나카 히로시(86) 일본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가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한 아시아학생문화협회는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을 지원하는 조직이었다. 일본의 1000엔짜리 지폐 초상이 쇼토쿠 태자에서 이토 히로부미로 바뀐 1963년 11월 어느 날 동남아시아에서 온 화교 유학생이 그에게 말했다. “이토는 조선 민족에게 원한을 사 하얼빈에서 살해당한 사람이 아닌가. 일본에 가장 많이 사는 외국인인 조선인도 같은 1000엔짜리 지폐로 매일 물건을 사야 하는데 몹시 잔혹한 일이 아닌가. (…) 1억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쩐지 섬뜩하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73년에는 한 남베트남 유학생이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에 실린 광고를 그에게 보여주며 개탄했다. ‘인도차이나 3국에 보급되어 있는 프랑스어를 배워, 인도차이나 인민과 우호를’이라 적힌 광고였다. 그 유학생은 평소에도 도쿄대 학생들이 자신에게 식민지 언어인 프랑스어로 말을 건다며 “도쿄대 학생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이냐”고 따져 물었던 터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 확인한 “일본인들과 다른 아시아인들 사이의 감각의 어긋남”이 지금의 다나카 히로시를 만든 셈이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나카무라 일성의 질문에 그가 답한 책 <공생을 향하여: 자이니치와 함께 걸어온 반세기>는 그가 관여한 자이니치(재일동포) 권리 투쟁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다나카 자신의 삶과 자이니치 인권 운동의 흐름을 접목한다. 한국인 원폭 피폭자로서 일본 정부에 치료와 보상을 요구하겠다며 밀항했던 1970년대의 손진두 재판에서부터 2010년대 고교 무상화에서 총련계 조선학교를 배제한 처분에 대한 취소 소송까지 그가 평생을 바쳐 헌신해온 자이니치 권리 투쟁의 족적이 역력하다.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 1971년 후쿠오카 고등재판소. <한겨레> 자료사진
손진두는 1970년 12월 세번째 밀입국으로 체포되어 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결핵 치료를 위해 후쿠오카의 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치료가 끝나면 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친 뒤에 한국으로 송환될 참이었다. 손진두로부터 ‘피폭자 건강수첩’ 제도가 있다는 설명을 들은 다나카는 관련 법률 어디에도 국적을 일본으로 제한하는 조항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먼저 피폭자 건강수첩을 신청하자”고 손진두를 설득한다. 1971년 10월에 신청했지만 후쿠오카현과 후생노동성은 수첩을 교부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다나카는 손진두를 도와 해당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해 결국 승리했다. 이 재판 이후 한국인 피폭자들의 일본 ‘방문 치료’가 가능해졌고, 일본 땅을 떠났던 일본인들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다나카는 재판에서 이긴 “결정적 요인은 ‘국적 조항’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관여한 자이니치 권리 투쟁이 “전부 ‘국적’ 문제로 환원”된다며, 자신의 지난 활동을 이렇게 요약한다. “국적이라는 것을 단서로 삼아 식민지 지배의 청산 문제라고 할까, 최근 쓰는 말로 표현한다면 포스트 식민지 문제의 가장 큰 근간을 추궁해왔다는 느낌입니다.”
손진두 사건에 앞서 1970년에는 히타치제작소의 입사 시험 이력서에 본명이 아닌 일본식 이름 ‘통명’을 써서 합격한 자이니치 2세 박종석의 입사 결정이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박종석은 그해 12월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원고의 손을 들어준 1심 판결에 히타치가 항소를 포기하면서 이 역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일본 내에서 그를 돕는 모임이 결성되고 한국에서도 히타치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의 상황이 그에 일조했다. “이 재판에서 이기든 지든 자신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히타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라고 박종석은 말했고, 재판이 끝난 뒤에는 ‘민족 차별과 싸우는 연락협의회’(민투련)가 결성돼 1970, 80년대의 자이니치 차별 철폐 투쟁을 견인했다.
자이니치 변호사 1호인 김경득 변호사가 2004년 11월24일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서 열린 ‘정주외국인의 지방참정권’에 관련한 심포지엄에서 ‘재일동포에 있어서 국적과 지방참정권’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하고 있다.
1976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자이니치 2세 김경득이 사법연수원 입소를 위해서는 일본 국적이어야 한다는 최고재판소의 요강에 반발해 기자회견을 열고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투쟁을 벌인 끝에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김경득 이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자이니치 12명은 모두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했지만, 그는 “귀화한 내가 어떤 모양으로 조선인 차별을 해소하는 문제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변호사가 된 김경득은 1994년 도쿄도 보건소에서 근무하던 자이니치 정향균의 재판을 맡았다. 관리직 승진 시험에 외국인은 응시할 수 없다는 결정에 맞선 재판이었다. 무려 10년 남짓 이어진 끝에 2005년 최종 패소로 결론이 났지만, 재판에 임하면서 정향균이 한 말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차별에 지고 싶지 않다. 굴복하고 싶지 않다. 문제에 부딪힌 인간이 거기에서 멈칫하면, 또 다음 사람이 같은 일을 당한다. 역시 처음 부딪힌 인간이 결심하고 나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음을 굳히게 됐다.”
재일동포 지문 날인 강요 항의 시민 서명 운동. <한겨레> 자료사진
지문 날인 거부와 에다가와 조선학교 재판은 승리했지만, 외국인 참정권 요구와 고교무상화 배제 철회 등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승리와 패배가 엇갈리는 과정을 거치며 다나카는 깨닫는다, 자이니치들의 문제가 곧 일본의 핵심 문제라는 사실을. “전후의 중요한 문제란 것은 자이니치 처우를 둘러싼 쟁점으로부터 보면, 정말로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일본의 전후, 평화와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들의 속이 텅 빈 모습이 떡하니 드러난다 할 수 있습니다.” 자이니치 권리를 둘러싼 쟁점은 “분명 자이니치의 인권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본 사회가 가진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2017년 9월13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 앞,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제외 조처 적법성을 묻는 판결에서 패소 판결이 나오자 변호인단이 ‘부당 판결’, ‘조고생의 목소리 닿지 않아’라고 쓴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그런가 하면 “일본의 외국인 정책 개선은 반드시 한국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할 것”이라던 김경득의 발언은 자이니치 권리 투쟁의 또 다른 의미를 일깨운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의 민주주의가 연동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다. 책 제목이 ‘공생을 향하여’인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