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최근 <정세현의 통찰>을 펴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14일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가 낸 책은 발간 며칠 만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비판을 많이 하면 책을 안 보잖아요. 현 정부 사람들이 제 책을 많이 읽으면 좋겠어요.” 책에 현 정부 비판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말에 대한 저자의 답이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국제질서에서 시대의 해답 찾기
삼국통일 이래 ‘종속 외교사’ 분석 “미국 쇠퇴하고 중국 뜨는 격동기”
“조폭 세계에서 국가 이익 지켜야”
“미국만 쫓다 일본에 또 먹힐 수도”
“북한 ‘핵보유 인정’ 상황 대비해야” 그는 미국의 말만 듣는 외교는 자칫 한국이 일본 밑에 깔리는 결과를 다시 부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지금 일본은 미국의 부장 노릇을 하고 있는데요. 미국이 힘이 빠질 때 ‘내가 나서서 중국과 1대1로 맞서 미국적 질서를 유지하겠다’며 미국의 위임을 받으려고 할 겁니다. 사실 미국 중심 질서는 명분이고 일본 중심을 꿈꾸는 거죠. 현재 일본 군함이 달고 다니는 욱일기가 그런 야심을 잘 보여주죠. 미국이 볼 때 한국은 일본의 밑이죠. 미국을 쫓아다니면 일본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중국과도 관계를 잘 유지하면 중국 힘이 세질 때 한국이 중심국으로 진입하기가 더 용이하죠.” 한국 외교의 자국중심성 결여는 어디서 기원하느냐고 묻자 그의 답은 이렇다. “종속성이 우리 유전자에 굳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신라 삼국통일 이후 고려나 조선까지 지배층은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인 것을 편하게 여겼고 일제 때도 ‘조선놈은 도리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끌어와 정권유지에 활용한 영향도 있죠.” 미국에 맞서면 오히려 한국 정부를 탓하는 ‘국민 정서’를 뚫고 외교의 자국 중심성을 관철할 수 있을까? 그는 “한국은 지금 군사적으로 세계 6위, 경제적으로 세계 10위로 국제적으로 존중받는 나라다. 앞으로 정치 지도자가 줏대 있는 외교를 하면 국민도 서서히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며 반문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한테 자기 할 일을 물어보는 초등생처럼 굴면 언제 정상 국가가 되겠어요.” 그는 책에서 1981년 자신의 서울대 정치학 박사 논문(마오쩌둥의 대외관 연구) 심사 때 일화를 소개하며 한국 여론 주도층에 만연한 미국 편향 시각의 문제를 짚기도 했다. “제가 논문 결론에 ‘1978년 개혁·개방한 중국이 경제 성장을 하게 되면 부국강병의 원리에 따라 반드시 군사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면 천하를 호령하던 과거 자국의 위상을 다시 회복하려고 할 터이니 이에 대비한 한국 외교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썼어요. 그런데 심사 교수들이 ‘중국은 경제가 발전하면 도농과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소수민족이 들고 일어나 쪼개질 터이니 대국의 명맥도 유지하기 어렵다’며 논문 수정을 요구하더군요. 교수들의 그런 생각이 바로 미국 시각이었어요. 외교관이나 학자들이 미국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지금도 큰 변화가 없어요.” 그는 외교의 자국 중심성 확보의 관건은 결국 사람이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 때 미국을 적당히 구슬리면서 중국이나 북한 관계도 발전시켰어요. 물론 대통령의 지향이 있어 가능했지만 임동원이라는 참모가 없었으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노무현 정부도 청와대에 이종석이라는 참모가 있을 때는 한미보다 남북관계를 중시했어요.” 남북관계 전망을 묻는 말에는 “남북관계도 사계절이 있다”며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겨울로 들어섰는데요. 영국 시인 셸리가 ‘겨울이 오니 봄이 머지않았다’고 읊었잖아요. 그처럼 다음 정부는 김대중, 노무현 시대처럼 남북관계의 봄을 맞을 가능성이 있어요. 물론 ‘김대중-임동원’ ‘노무현-이종석’과 같은 대통령-참모 조합이 된다면요.” 그는 책 말미에 북한은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침공당하는 것을 보면서 ‘절대 핵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미국이 북의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하는 협상으로 한국을 몰아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핵보유국을 인정받은 북한이 경량화, 소형화된 핵폭탄을 실전 배치하는 게 우리에겐 최악의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북이 우리를 군사적으로 위협하면 그들이 먹고사는 데 타격이 올 만큼 남과 북이 경제적으로 의존도가 높아지도록 구조화해야죠. 지금의 한중 관계처럼요.” 그는 북한과의 관계는 통일이 아니라 유럽연합과 같은 국가연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사실상 남과 북이 두 개의 국가가 된 지 오래입니다. 우선 경제력 차이가 너무 커요. 남북 소득 차이가 28배나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연합도 쉽지 않아요. 통일은 북한에 시스템 변화가 생겨 남북의 유사성과 동질성이 커지는 시점에서 남북 주민들이 결정할 문제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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