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갈등, 다툼, 이야기, 분쟁, 분열 / 게티이미지뱅크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l 위즈덤하우스 l 1만8000원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기억을 전승하고 문명을 이루었다. 재미와 교훈을 아울러 주는 이야기는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구성원들의 행복감을 높여준다. 이야기는 특히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자들과 문학인들이 한목소리로 문학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까닭이다.
이렇듯 상찬만이 쏟아지는 이야기에 감히 딴죽을 걸고 나설 이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이유로?
미국 워싱턴·제퍼슨대학 영문학과 연구원인 조너선 갓셜의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은 이야기가 지닌 양면성에 주목한다. 이야기가 공감 능력을 높이고 구성원을 결속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과 적대, 증오의 무기로 쓰일 수도 있다는 것. 이런 ‘이야기의 역설’(책의 원제 ‘The Story Paradox’)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서문의 제목 ‘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에 지은이의 문제의식이 집약되어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이야기의 역설이다. 이야기는 인류의 오래된 저주이자 축복이다. 우리의 질병이자 치료제다. 숙명이자 구원이다.”
이 책에서 갓셜이 말하는 이야기는 허구와 역사, 뉴스와 음모론을 두루 아우른다. 사실과 거짓,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에 구분이 분명하다 해도 그 모두를 이야기라는 틀로 한데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소비하는 이야기에 의해 창조된 정신적·정서적·상상적 공간”을 뜻하고자 ‘이야기우주’(storyverse)라는 용어를 만들어 쓴다. 이 가상 우주는 비록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강한 힘을 지닌다. “사실상 모든 대규모 인간 갈등은 (책에 쓰였든 아니든) 서사의 전쟁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이처럼 큰 힘을 지니게 된 까닭과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갓셜은 우선 이야기가 지닌 대결 구조를 든다. “이야기들이 무엇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문제에 몰두해 있”다는 것이다. “지붕이 집의 토대이듯 투쟁 구조는 스토리텔링의 근본적인 구조 성분”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주동인물에 공감하며 반동인물을 증오한다. 악당의 존재는 이야기에 필수적이다. 선한 주인공만 있어서는 ‘좋은’ 이야기가 성립하기 어렵다. 천국의 이야기가 까다롭거나 아예 불가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사를 퍼뜨리는 것은 악당을 퍼뜨리는 것이며 악당을 퍼뜨리는 것은 분노, 판단, 집단 간 분열을 퍼뜨리는 것이다.”
페르디난트 켈러의 그림 <세헤라자데와 술탄 샤리아르>. 세헤라자데는 술탄에게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죽음을 유예할 수 있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야기가 자랑하는 공감 능력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외집단보다는 내집단에 공감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이런 탓에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공감의 주된 효과는 우리 대 그들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하게 덧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대인 절멸에 동조하며 환호했던 나치 시대 독일인들,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투치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르완다 후투족을 부추긴 것은 모두 이야기였다. “자살 폭탄 테러범의 지독한 증오는 지극한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든 증오와 사랑을 그에게 심어준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사태를 악화시킨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서사이동을 경험한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현실에서 벗어나 그 이야기 속 상황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이야기에 몰입하며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악당에게 분노한다. 악당이 사악하고 강할수록 우리가 느끼는 공감의 강도도 높아진다. 부정적인 뉴스, 어처구니없는 음모담, 자극적인 선동이 먹히는 것은 우리 디엔에이(DNA)에 새겨진 이런 강력한 서사 편향 때문이다.
2020년 2월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 연설 당시 공화·민주 양당 의원들이 보인 극단적으로 상반된 반응과 2021년 1월 폭도들의 의사당 난입은 지은이에게 “미국이 둘로 갈라졌”으며 “결국 내전으로 치달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풍경과 우려는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갓셜의 문제의식이 새로운 것은 그 바탕에 이야기가 있다는 통찰 덕분이다. 소통의 도구로 출현했으나 오히려 분열과 적대의 풀무로 구실하고 있는 페이스북을 비롯한 에스엔에스의 악영향에도 이야기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이야기는 (…) 거대한 통합자에서 거대한 분열자로 바뀌었다.”
자신이 꿈꾼 이상적인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 플라톤의 주장에 갓셜은 어느 정도 공감한다. 스승 소크라테스가 공동체의 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데에는 그를 소피스트의 원흉으로 풍자·고발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플라톤의 판단이었다. 소설적 구성을 취한 <…호모 픽투스의 모험> 한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제자 플라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도시의 권좌에 누가 앉아 있더라도 세상을 진정으로 다스리는 것은 이야기꾼이라네.” 그러니 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
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로렌치니의 소설 <피노키오의 모험> 1883년 초판에 실린 엔리코 마찬티의 삽화. 거짓말쟁이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그의 코가 늘어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의 공화국에서처럼 시인과 이야기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플라톤 자신, 시인 추방론을 비롯한 자신의 주장을 유려하고 다채로운 이야기 형식을 빌려 설파했다. 이야기우주의 구성원인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과학을 통해 이야기의 독성을 무력화하는 것, 그리고 덜 분열적이며 통합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퍼뜨리는 것이다. 숱한 부작용과 폐해에도 불구하고 치료제이자 구원으로서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다는 것이 영문학자인 지은이의 판단이다. ‘우리’ 편에 대한 공감에 못지않게 “악마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며 이 역시 이야기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서문에서 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고 했던 갓셜은 이야기와 이야기꾼에 관한 조언을 담은 경구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야기를 증오하고 거부하라./ 하지만 이야기꾼을 증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평화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이야기에 말 그대로 반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자들을/ 경멸하지 말라.”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