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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부끄럽지 않은 글을 위해 내 삶의 대부분을 소진했다

등록 2023-03-03 05:00수정 2023-03-03 09:32

등단 9년 박지음 두번째 소설집
5·18, 여순사건, 장애·이민 차별
비틀린 현실과 과거사 체감토록
‘변신’의 미학…집요한 글쓰기

관계의 온도
박지음 지음 l 아시아 l 1만5000원

독후감이 다소간 불편해질 수도 있는 단편 ‘화랑곡나방’을 먼저 따라가 본다. 소설가 박지음(43)의 두번째 소설집 <관계의 온도> 속 마지막에 배치된 작품이다.

16살 사내는 수음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자처럼 한심하고 무력한 일상을 보낸다. 그의 엄마는 몇만원의 해웃값을 사정하며 거리에서 몸을 판다. 이 설정이 얼마나 개연성을 갖는가 따질 수도 있겠다. 이들이 사채로 아버지와 헤어지고 “사채는 피를 타고 흐”른다며 그들을 좇는 검은 양복들을 피해 불법체류와 신용불량, 가난이 다글다글한 도시 변두리로 숨어들어왔다는 배경이 더 구체화되기 전까지.

엄마한테도 욕을 서슴지 않는 사내가 ‘악마’로 기어코 진화하는 경위는 두 가지다. 약속한 몸값 삼만원을 주지 않은 남자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한 엄마를 보게 된 이후, 엄마와 관계 맺는 남자들을 벽돌로 쳐 금품을 갈취하기 시작한다. 그중 시시티브이(CCTV)에 찍힌 폭행 장면이 뉴스로 보도된 뒤 되레 사채꾼들에게 위치가 탄로 나고, 칼로 위협을 당한 뒤로 사내는 더 잔악해진다. 며칠 남지 않은 15번째 생일을 넘겨 자살을 하면 받게 되는 사망보험금(만 15살 미만의 경우 사망보험금이 발생하지 않는다)으로 빚을 탕감하면 엄마는 살려주겠다는 약속과 함께다.

“하루하루 악랄해지느라 바쁜 몸”이 되어가는 사내의 심리나 행적이 얼마나 개연성을 갖는가 따질 수도 있겠다.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현실을 ‘감각’시키는 데 문학의 존재 증명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문학 속 ‘변신’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엘리아스 카네티(불가리아 출신 영국 작가)에게 그랬듯 세계를 바라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고집스러운 방식이고, 사내의 위악적 변신은 우호적이지 않은 세계는커녕 대놓고 반목적인 세계를 들추기 위한 최후이자 최선의 방식인 셈이다. 무엇보다 모르는 현실, 나아가 특권을 구가하는 악마들의 단죄되지 않아 감각될 수도 없는 고집스러운 세계는 겨우 드러난 사례만으로도 너무 많지 않은가.

‘화랑곡나방’ 사내가 악마화되는 경위는 둘이지만 이유는 하나다. 위선과 타락의 기성사회에서 기행하는 청소년 홀든 콜필드에게 수호해야 할 대상으로서 가장 순수한 여동생 피비가 그랬듯, 죽음을 무릅쓰고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고 달고 온 것에 감동”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위해) 팔 수 있는 게 엄마밖에 없는 남자”라는 청소년에겐 엄마만이 지켜야 할 영토의 전부다.

“…나는 이 동네를 모두 털어다가 엄마한테 주고 싶었다. 엄마는 돌아누워 잠을 잤고 나는 이불 속에서 고추에 난 털을 만지작거렸다.”

‘변신’이란 게 밥 한번 지어 먹일 겨를 없던 엄마를 상기시키는 쌀통 속 바글바글한 쌀벌레의 것, 그러니까 고작 “온종일 납작 붙어 있다가 아쉬운 듯 짝짓기”나 하는 화랑곡나방으로의 과정일지언정 말이다.

내년 등단 10년을 맞는 박지음 작가. 아시아 제공
내년 등단 10년을 맞는 박지음 작가. 아시아 제공

박지음 작가의 작품들은 시종 뒤틀린 현실과 과거사에 깊숙이 개입한다. 내년 맞는 등단 10년의 행보가 그 문학적 본령에서 단 한 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2020년 첫 소설집 <네바 강가에서 우리는>에서 그려졌던 “한결같이 제도적 일상에서 억압된 ‘무엇’”(정은경 평론가)들이 이번 소설집에선 더 직접적으로 다뤄진다 해야겠다. 그 맥락에서, 대체로 잊혀지려는 지난 ‘오늘’들을 환기시키고, 끝끝내 체감시키려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방식이 ‘변신’인 것이다.

좌익 군인들에게 식당 밥을 먹였단 이유로 우익이 들어선 도시에서 죽임을 당한 엄마, 마찬가지 ‘빨갱이 잡자’ 눈이 뒤집힌 온 동네 사람들로부터 쫓겼던 여덟 살 딸 순덕이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여수를 탈출해 수잔이란 이름으로 미국에서 가정을 이뤄 살다 손녀와 함께 70년 만에 고향을 찾으며 다시금 순덕으로 변해가는 과정(‘돌의 노래’)으로 여순사건은 현재화하고, 장애인 딸의 자살에 책임을 느낀 엄마가 전혀 신체기능에 이상이 없는데도 걷지 못하게 되는 ‘정신신체장애인’이 되는 과정(‘기요틴의 노래’)으로 혐오와 차별의 중층성, 허위의식 따위가 자수하듯 폭로된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 남겨진 캄보디아 출신 새엄마와 이복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나’가 결국에 그들로부터 버림받고 고아가 돼버리는 ‘내 이름은 뿌레야꼬’, 5·18 학살로 아버지를 잃은 여인이 미국 애리조나 조카의 결혼식장에서 참회하며 살아간다는 계엄군 출신 이민자 노인을 만나는 ‘세도나’ 역시 내밀하고 은유적인 변신의 작동에 기대고 있다. 부동산, 직업 등 물적 조건과 인간적 관계의 거리를 세밀하게 탐색하며 단편 가운데 가장 덜 사회적이라 할 표제작 ‘관계의 온도’에서도 두 여주인공은 시선에 따라 또 다른 자아로의 변신을 거듭한다.

<관계의 온도>엔 2015년 발표한 ‘화랑곡나방’부터 지난해 말 ‘세도나’, 그리고 미발표작이던 ‘돌의 노래’ ‘관계의 온도’ 등 9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공히 ‘집착’이 있다. 부조리한 현실과 과거에 대한 작가의 집착일 텐데, 잊히려는 것을 잊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소재가 선택되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엮어 발화해 간다는 느낌을 준다. 때로 단점이 될 것을 무릅쓰고 설명적으로 대목을 ‘상세히’ ‘단호히’ 전개시키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 모르겠다.

‘작가의 말’을 통해, 어떤 이야기들이 본인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알게 되면 더더욱 개연성을 물었을 일이 무색해지고, 아래 이런 고백을 들으면 저 한 줄 단점의 언급도 군색해진다.

“나는 그런 분들께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내 삶의 대부분을 소진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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