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나다
촘스키, 다극세계의 길목에서 미국의 실패한 전쟁을 돌아보다
노엄 촘스키·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유강은 옮김 l 시대의창 l 1만5000원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95)는 1960년대 이래 미국의 패권주의·제국주의 행태를 쉼 없이 비판해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대외정책 비판자”(<뉴욕 타임스>), “미국에서 가장 돋보이는 공공 지식인”(앤절라 데이비스)이라는 평가를 받는, 우리 시대 양심을 대변하는 학자다. 지난해 미국에서 나온 <물러나다>(The Withdrawal)는 인도 출신 언론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촘스키와 나눈 대담을 엮은 책이다. 2021년 8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계기로 하여 이루어진 이 대담은 21세기에도 그칠 줄 모르는 미국의 패권주의 전쟁의 실상을 고발한다.
노엄 촘스키. 쉼 없는 미국 패권주의 비판으로 미국에서 가장 돋보이는 공공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촘스키는 미국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에 붙인 딱지를 그대로 미국에 되돌려 미국이야말로 ‘불량국가’이며 ‘테러리스트 국가’라고 부른다. 촘스키는 왜 미국이 그런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본문의 대담에서 촘촘한 자료와 정보로 입증한다. 두 사람의 대담은 베트남전쟁에서 시작해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3년 이라크 침공, 2011년 나토를 앞세운 리비아 침공으로 이어진다.
촘스키는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가 미국이 소련에 맞서 조직한 과격 이슬람 단체 무자헤딘에서 태어난 것임을, 다시 말해 미국이 알카에다 탄생의 조력자였음을 강조한다. 알카에다 비호를 빌미로 삼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죽음과 폐허만 남기고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핑계로 들이밀며 시작한 이라크 전쟁도 끔찍한 혼란과 파괴만 남겼다.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유엔 안보리의 중재 결의안을 받아들였지만, 미국과 나토는 이 결의안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카다피를 제거했다. 그 결과는 10여 년째 계속되는 리비아의 대혼란이다.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리비아 전쟁의 공통점을 열거한다. 첫째, 엄청난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무수한 민간인 학살이 저질러졌다. 둘째, 미국이 지원한 건 민주 세력이 아닌 ‘부패한 부자들’이었다. 셋째, 미국의 침공은 유엔헌장을 무시했다. 촘스키는 미국이 스스로 ‘국제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예외적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의 행위가 곧 정의라고 믿는 것이 이 모든 전쟁의 배경에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국제 규범을 제대로 따른 적이 없는 유일한 강대국이다. 이 미국 예외주의가 미국을 ‘마피아 대부’ 같은 행동으로 이끈다고 촘스키는 말한다.
이 책은 21세기에 미국이 주도한 20년 전쟁은 모두 실패했고 미국의 일극 체제는 오히려 약해졌다고 말한다. 미국의 패권 약화에는 중국이라는 세력의 등장도 한몫을 했다. 대담은 말미에 이르러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라는 현상에 논의를 집중한다. 미국은 ‘규칙 기반 질서’를 강조하며 중국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그 규칙은 미국이라는 ‘마피아 대부’가 정한 규칙일 뿐이다. 미국의 목표는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 말고는 없다. 촘스키는 미국이 ‘중국 저지’라는 목표를 이루려다가 자칫 전면 충돌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때의 전쟁은 “사실상 인류 전체의 공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미-중 대결 와중에 벌어진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고 말한다. 중국이 러시아와 결속해 중-러 관계를 강화하는 것을 막으려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불렀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이라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대담자들은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으로 유럽의 외교정책이 미국의 정책에 예속될 것이며, 미국의 바람과는 반대로 중국과 러시아의 결속이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기에 더해 촘스키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화석연료 회사와 군수업체가 희희낙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 전쟁으로 기후 파괴에 따른 인간과 생물의 종말이라는 재앙을 피할 마지막 기회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촘스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담을 마친다. “아직 방향 전환을 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 수단도 알고 있고요. 의지만 있으면 재앙을 피하면서 훨씬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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