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구약성서
장 루이 스카 지음, 박요한 영식 옮김 l 가톨릭대출판부 l 2만원
20 세기 기독교 성서 해석 방법론의 주류를 이룬 것은 ‘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이다. 역사비평이란 성서라는 텍스트 뒤에 있는 역사적 세계를 밝혀내는 비평 방식을 뜻한다. 텍스트의 역사적 기원을 드러냄으로써 텍스트가 지닌 의미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역사비평이다. 역사비평은 텍스트 성립의 역사적 배경을 전면에 끌어냄으로써 성서 해석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텍스트를 텍스트 자체로 이해한다는 ‘텍스트 읽기’ 차원에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는 약점이 있다.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1980년대 이후 등장한 것이 ‘설화비평’(narrative criticism)이다. 벨기에 출신 성서학자 장 루이 스카가 쓴 <처음 만나는 구약성서> 는 이 설화비평에 기반을 두고 구약성서 읽기를 안내하는 책이다 .
구약성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수집하고 기록하고 창작한 책들의 모음이다. 이 책 모음에는 그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책,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작품만 수록돼 있다. 그러므로 지은이 말대로 구약성서는 책으로 된 ‘국립도서관’이라고 할 만하다. 그 책은 세상 창조에서 시작해 고난의 역사를 관통한다. 구약성서의 텍스트들은 여러 차례 수정‧보완을 거쳐 오늘의 형태로 편집됐다. 설화비평은 그 최종 편집자가 왜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수집하고 변형하고 편집했는지를 알아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를 편집하는 방식에 깃든 고대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설화비평적 읽기의 관건이다.
벨기에 출신 성서학자 장 루이 스카. 위기미디어 코먼스
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들에는 저마다 ‘공백’이 있고 ‘생략’이 있다. 그 공백과 생략은 책을 읽어가는 이에게 물음을 남기지만, 텍스트는 곧바로 답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서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의 능동적 참여’다. 공백과 생략 앞에서 독자는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이 책은 신약성서 ‘루가복음서’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돼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자 화가 난 큰아들은 참석을 거부한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큰아들이 그 뒤 어떻게 했는지 텍스트는 말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독자가 그 빈칸을 채워 넣어야 한다. “독자가 이야기를 깨우러 올 때까지 이야기는 잠을 잔다.”
설화비평은 텍스트를 텍스트 자체로 해석하는 문학비평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이 책은 특히 20세기 문학사가 에리히 아우어바흐가 대표작 <미메시스>에서 보여준 구약성서 해석에 주목한다. 아우어바흐는 <미메시스> 첫 장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19장의 오디세우스 이야기와 구약성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이삭 이야기를 비교한다. 호메로스의 서술이 “구체적인 묘사, 균등한 조명, 중단 없는 연관, 거침없는 표현, 모든 사건의 전경 배치, 의심의 여지 없는 의미의 전시” 따위를 특징으로 한다면, 구약성서의 서술은 “어떤 특정한 부분을 강력히 조명하고 다른 것은 어둠 속에 버려두는 수법, 갑작스러운 당돌함, 표현돼 있지 않은 것의 암시력” 따위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성서 텍스트는 아브라함의 심리를 조명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묵묵히 신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이런 공백이 독자에게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이 주목하는 두 문학 작품의 또 다른 차이는 인물의 성격과 문체의 특성에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귀족 계급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숭고한 문체로 묘사하는 데 반해,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영웅적이지 못한 인물들을 민중적 산문체로 간명하게 서술한다. 다윗이 단적인 경우다. 다윗 이야기의 세속적 문체는 호메로스 영웅들을 묘사하는 웅장한 문체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다윗이라는 인물 자체도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왜소한 다윗은 정면승부를 피하고 술책을 써서 골리앗을 넘어뜨린다. 부하를 속여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내를 빼앗은 사람도 다윗이다. 다윗은 영웅이 아니라 ‘반영웅’이다. 다윗의 행동에는 숭고함이 없다. “다윗의 이야기는 서사시의 패러디다.” 이런 반영웅적 면모는 성서의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난다. “성서는 영웅들의 시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쓰라린 패배의 역사다. 구약성서에서 진정한 ‘영웅’이 있다면 지상의 인간들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신 야훼다.
이 책은 구약성서가 서로 충돌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음도 강조한다. 이를테면 성서의 주인공 야훼는 여러 얼굴을 지닌 신이다. ‘이사야’ 45장에서 야훼는 이렇게 말한다. “빛을 만든 것도 나요, 어둠을 지은 것도 나다. 행복을 주는 것도 나요,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나다.” 그 야훼는 ‘호세아’ 11장에서는 다른 말을 한다.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한쪽에는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을 주는 신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떤 경우에도 분노를 참는 신이 있다. 이 충돌을 해결하려면 야훼의 목소리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이사야’ 45장은 한계 없는 신의 능력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반면에 ‘호세아’ 11장은 혹독한 시험에 든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지은이는 성서를 일종의 교향곡으로 볼 것을 주문한다. 음표 하나하나는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모여 교향곡의 총체적 아름다움을 이루어내듯이, 성서도 그렇게 전체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개별적인 사실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헤겔의 말은 구약성서에도 들어맞는다. 텍스트의 한 면을 절대화하는 것이야말로 독서를 위험에 빠뜨린다. 그 위험을 피하려면 전체를 보아야 한다. 지은이는 거듭 말한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우리가 던지는 모든 물음에 완전히 답하는 경우는 없다.” 이야기들은 물음을 통해 독자에게 길을 제시하고 안내할 뿐이다.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 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