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희 작가의 <하얀 저고리> 작업 노트엔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메모가 있다. 그는 이 메모 등을 참고해 영우의 고문 피해를 묘사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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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 소설가의 미출간 장편 <하얀 저고리>는 ‘말의 저항’이기도 하다. ‘당대의 지배 논리들’과 대결하는 작가의 말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쏟아진다.
“(박정희가) 일자리는 많이 만들었지? 그렇게 해서 실업자를 없앴지?” 동생들이 묻자 큰오빠 영우는 말한다. “현대 독재자들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자본과 기술이 없어도 그들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공업용수 풍부한 강이나 바닷가에 공장 지을 땅만 내주면 거기에 옛날에는 상상도 못 했던 거대한 공장이 들어서고 비쩍 마른 국민들은 줄을 서서 들어가 열심히 일했지. 국민들은 공장에 나가며 날마다 힘이 쭉 빠져 나왔지만, 전처럼 굶지는 않았다. 굶주림으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켰다는 말을 안 한 독재자는 그래서 없어. 특히 농민도 쌀밥을 먹게 되었다는 이 눈물 나는 한국식 선전어는 불인두 낙인이 찍혀 역사에 오를 자와 그 협력자들이, 그리고 군부독재가 시작되며 온 집안이 재화로 넘쳐흘러 전보다 백배 천배 더 행복해진 그 가족들이, 아직도 행복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살갗 얇은 사람들 들으라고 일제히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불의한 권력 앞에서 그는 한 사람의 힘없는 시민이었지만, 불의한 언어 앞에선 한 사람의 작가로서 지지 않기 위해 ‘말의 날’을 갈았다. 그 말들이 <하얀 저고리> 작업 노트들에 날카롭게 곤두서 있다.
“나는 집권·재벌 기업주들의 아들딸 손자들이 공장·농촌에서 일해 우리만큼 돈 받고 그것으로 먹고살다 보면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것이,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기를 바란다.”
30년 이상 앞서 쓰인 문장이 지금의 우리를 아프게 찌르기도 한다.
“아파트값 땅값 치솟자 노태우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노태우는 이 세상 최고의 미남이었고, 그는 신뢰였으며, 희망이었고, 꺼져서는 안 될 등불이었다.”
시대와 불화해온 작가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말들도 있다.
“민중과 똑같이 살기를 바랐다. 민중이 부자가 될 때 그도 부자가 될 생각이었다. 국민이 가난할 때 부자가 되어 잘 사는 것은 죄악이었다. 민중과 더불어 살고, 가난하고, 위험도 늘 따르는 그런 생활.”
한 노트엔 그가 여러 장의 메모지에 이어 쓴 ‘작가의 말’이 있다. 투명테이프로 연결한 메모지들이 시간을 견디느라 다갈색으로 변했다. 1990년 <작가세계>에 <하얀 저고리> 연재를 시작하며 쓴 것으로 보이지만 잡지에 실린 말과 겹치는 부분은 한 문장(아래 [ ] 표시)밖에 없다. 작가가 덜어낸 말들의 일부를 복원한다.
“(광주 학살 이후) 병과 싸우며 이 작품을 썼다.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슬퍼졌고, 분했고, 계속해서 두 장 세 장 앉은 자리에서 써본 적이 없다. (…) 내가 섞여 더불어 살고 싶지 않은 세상으로 다들 달려가고,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생각 말해 봐야 벽을 혼자 치는 것 같고. 그러나 남한 4천만이 다 옳고 나 혼자 틀리더라도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 말한다는 마음. 그 마음 위해 나의 가족까지 안쓰러운 생활 하게 (만들었다). (…) 1980년 5월 광주혁명의 영령들, [이 땅에 없는 자유, 민주, 통일 위해 죽어간 모든 이들, 그리고 전 세계 백육십 몇개 나라 다 피해 이 땅에 태어날 미래의 아이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옛날이야기도, 그리고 전두환이 동향 군대 친구들과 손잡고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 지으며 온 국민을 저희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던 시대의 이야기도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바칠 생각은 없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