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기 몇 달 전 집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아버지 품에 안긴 아이가 줄리 세디비다. 지와사랑 제공
이중언어의 기쁨과 슬픔
한 언어심리학자의 자아 상실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
줄리 세디비 지음, 김혜림 옮김 l 지와사랑 l 1만9000원
러시아 망명자 출신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1951년에 첫 번째 자서전 <결정적 증거>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혁명 전 러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애를 먹었는데,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책을 직접 번역하는 동안 새롭고 생생한 디테일이 떠올라 추가할 수 있었다. 이런 디테일을 보탠 영어 개정판 <말하라, 기억이여>(Speak, Memory)는 1967년에 출간되었다. 영어로는 말하지 않았던 나보코프의 어떤 기억들이 러시아어로는 말을 한 셈이다.
체코 출신 캐나다 언어심리학자 줄리 세디비의 인문 에세이 <이중언어의 기쁨과 슬픔>에 이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의 원제 ‘기억이 말한다’(Memory Speaks)는 나보코프의 자서전 제목에 대한 응답처럼 읽힌다. ‘언어와 자아의 상실과 회복에 관하여’라는 부제대로 이 책은 체코 출신으로 영어권에 정착한 지은이가 잃어버렸던 체코어를 되찾는 과정을 축으로 삼는다.
1971년 네 살 나이로 캐나다에 도착한 세디비는 미국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브라운대를 거쳐 캘거리대에서 언어학과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아버지는 1992년 체코로 돌아갔지만, 학업과 결혼 및 육아, 학교 생활 등으로 바빴던 그는 아버지가 숨지고 나서야 체코를 방문하게 된다. “아버지는 나와 정기적으로 체코어로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바로 “모국어의 상실”을 의미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체코에서 그의 모국어는 절름거리고 휘청대며 자주 길을 잃었다. 친척들은 그의 ‘누더기 같은’ 체코어를 들으며 킥킥거리거나 때로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향에서 몇 주를 지내며 어릴 적 기억을 오감으로 되살리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체코어가 돌아왔다. “몇십 년 동안 쓰지 않았던 단어들이 입에서 튀어나와 스스로 놀랐다.” 언어는 잊히거나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단지 다른 언어들의 먼지와 파편 밑에 오래 묻혀 있었을 뿐이었다.” 나보코프에게 언어가 기억을 불러냈다면, 세디비의 경우에는 기억이 언어를 되살렸다. 기억이 말했다.
<이중언어의 기쁨과 슬픔>은 지은이 자신의 “언어 여행”과 전문가적 통찰 그리고 각종 연구 결과들을 버무려 이중언어의 세계를 탐색한다. 이민과 취업, 입양 등으로 모국어를 떠나 제2언어로 갈아탄 이들이 두 개의 언어로 살면서 겪는 기쁨과 슬픔을 담았다.
줄리 세디비(오른쪽 둘째)와 어머니, 오빠, 언니, 동생이 캐나다 몬트리올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와사랑 제공
어린 세디비가 체코를 떠나 캐나다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모국어인 체코어는 존재 자체가 흐려지고 지워진다. 새로운 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땅의 언어인 영어를 제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체코어는 영어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성공은 영어로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모국어를 잃는 경험이 사소한 것은 아니다. “모국어를 잃는다는 건 어린 시절뿐 아니라 인생 전체의 맥락과 단절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민 가족이 ‘언어 이주’를 하는 과정에서 세대 간에 적잖은 편차와 단절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자녀들이 새 언어를 빨리 익히는 것과 달리 부모 세대의 학습은 더디기만 하다. 자녀들은 모국어를 잊고 부모는 새 언어에 서투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를 야기한다. “부모와 자녀가 한집에 살지만 서로 편한 공통의 언어가 없으면, 부모는 인생의 교훈을 전하거나 위로를 건넬 수 없고 심지어 자녀의 문제와 어려움을 세심하게 이해할 수 없다.”
새로운 땅의 언어를 효과적으로 습득하려면 원래의 언어를 빨리 잊어야 한다며 집 안에서 모국어 사용을 금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비주류 언어(=모국어)가 동등하게 대화에 사용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오히려 주류 언어의 표현에도 더 능숙하다.”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쓰는 데에 갈등과 혼란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거의 모든 인간은 두 언어를 아는 데서 오는 내적 투쟁을 수용할 수 있다.”
게다가 지은이 자신의 경험에서도 보다시피 모국어의 존재감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한 연구에서는 한국어에 대한 기억이 없는 한국계 입양인들이 한국어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네덜란드 출생자들보다 한국어 소리 발음을 더 빨리 배웠다. 심지어는 생후 6개월에 입양된 이들한테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언어는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회복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 회복은 좀 더 본질적인 가치와도 연결된다. 몇십 년 만에 모국을 방문해서 체코어를 다시 찾은 지은이는 그 경험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내 일생의 테두리 안에만 묶여 있지 않다는 깊은 시간적 감각을 얻었다”고 술회한다.
줄리 세디비(맨 왼쪽)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삼촌(오른쪽 셋째)이 만든 모라비아 지방 와인을 즐기고 있다. 지와사랑 제공
이것으로 지은이의 언어 여행은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자신과 같은 백인 이민자가 캐나다를 새로운 고향으로 삼게 된 이면에는 이곳에서 수천 년 동안 살다가 쫓겨난 토착민들의 고통이 있었음을 상기한다. 토착민들은 땅을 잃고 언어를 잃고 목숨을 잃었다. 언어학자들은 세계적으로 6천~7천 개에 이르는 언어 가운데 앞으로 몇 세대 안에 적어도 절반이 소멸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존하는 언어의 90퍼센트는 한 세기 안에 사라질 것으로 추측한다. 잃어버렸던 체코어를 되찾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아메리카 토착민의 언어를 소멸 위기에서 구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디비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토착민 언어 강좌를 수강하며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 역시 습득하는데, 특히 프랑스계와 토착민의 혼혈인 메티스족이 양쪽 말을 혼합해 만든 미치프어에 크게 매료된다. 미치프어는 비록 “모태가 되는 문화들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만든 고아의 언어”이지만, “두 가지 언어의 복합성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기 때문에 두 가지 유산에 대한 권리를 모두 주장한다”. 지은이는 이중언어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고, 이런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것이 내 이야기입니다. 이주와 상실, 발견과 재생, 사랑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중언어의 기쁨과 슬픔>의 지은이 줄리 세디비. 지와사랑 제공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