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 교수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김정기(83)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는 2년 전 발족한 ‘반민특위·국회 프락치사건 기억연대’(이하 기억연대)의 이사를 맡고 있다.
정부수립 첫해인 1948년 10월 국회에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설치되지만 친일파가 다수 포진한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좌초한다. 오히려 반민특위를 주도한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특위 활동 기간인 1949년 봄부터 남조선노동당 프락치로 몰려 헌병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국회의원 13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고 이 중 12명은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갔다.
두 사건 관련자 후손들이 주축인 기억연대 이사를 김 교수가 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그가 2008년에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1, 2>를 출간해 이 사건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2년 전에는 이 사건 후손들이 당한 고통까지 담아 <국회 프락치 사건의 증언>이라는 책도 냈다.
그는 최근 정부수립 직후부터 두 차례에 걸쳐 7년 동안 주한 대사관에서 근무한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1922~88)의 생애를 살핀 책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한울)도 냈다. 기억연대는 또 오는 23일 오후 2시 서울 광복회관에서 헨더슨 35주기 추모행사와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 북콘서트도 한다.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3동 연구실에서 김 교수를 만나 그와 기억연대가 왜 헨더슨을 기억하는지 이유를 들었다.
사실 김 교수가 2008년 낸 책은 헨더슨 사후 4년 뒤인 1992년에 그가 고인의 부인에게 건네받은 ‘국회 프락치 사건 공판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
미 대사관 3등 서기관 헨더슨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지자 1949년 11월 첫 재판부터 이듬해 결심공판까지 한국인 직원 둘을 매번 재판정에 보내 재판 과정을 모두 기록했다. 이 자료는 이전에는 수사기록과 검사 논고, 판결문만 간접적인 형태로 남아 있던 프락치 사건의 빈틈을 메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자료로 재판을 받은 국회의원 13명이 고문을 당했고 남로당 조직원으로 법정에 불려온 증인들은 심한 고문으로 일어설 수도 없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 ‘국회의원 프락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인으로 검찰이 내세운 남로당 연락책 정재한이 재판 시작 한 달 만에 서둘러 총살당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헨더슨 기록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 재판이 전체적으로 엉터리였음이 밝혀졌죠.”
헨더슨은 미국 터프츠 대학 교수 시절인 1972년 한국을 찾아 프락치 사건 담당 검사(오제도)와 판사(사광욱), 변호사 등을 직접 인터뷰해 자료를 남겼고, 별세를 앞두고 이 사건을 다룬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 글은 헨더슨 사후 3년 뒤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낸 <남한의 인권:1945~1953>에 실렸다.
김 교수는 헨더슨이 “대사관 상사의 눈총을 받으며” 독자적인 판단으로 프락치 사건 기록을 남긴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헨더슨은 프락치 사건을 신생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아니면 독재로 가는 분수령으로 봤어요. 국회의원 13명을 고문 조작한 이 사건을 의회에 대한 테러라고도 했죠.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분신인데, 이 사건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반신불수가 되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이승만 정부, 국회의원 13명 구속하자
헨더슨 ‘민주주의·독재 분수령’ 판단
대사관 직원 둘 보내 공판 과정 기록
1992년 헨더슨 부인한테 자료 받아
2008년 ‘재발견’ 내고 이어 ‘후손 증언’ 책도
후손들 23일 광복회관 헨더슨 추모행사
1986년 미 컬럼비아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헨더슨과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는 김 교수는 이번 평전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외교관과 학자의 눈으로 관찰한 헨더슨 생애를 상세히 짚었다.
1961년 5·16쿠데타 1~2년 뒤 쿠데타 주역인 박정희와 김종필 공산주의 전력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던 헨더슨은 1963년에 당시 박정희 군정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 등에 대해 생각을 밝힌 한국 언론 인터뷰를 빌미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고 리영희 선생이 취재한 이 인터뷰 뒤 박 정권이 헨더슨을 ‘기피 인물’로 찍었고 당시 미국 대사가 이를 묵인해 ‘헨더슨 추방’으로 타협한 거죠.”
국무부를 떠난 이듬해인 1964년부터 학계에 자리한 헨더슨은 죽기 전까지 한국 독재정권의 반인권적 행태를 고발하는 선봉에 섰다. 그는 특히 자신과 제롬 코언 미 하버드대 교수의 제안이 계기가 되어 열린 미 의회 남한 인권청문회에 74년과 76년 두차례 나가 고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미국 내 불법 활동 등을 고발했다. 광주항쟁 3년 뒤인 1983년에는 미국 일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에 기고해 ‘한국군의 광주 시민 학살에 대한 미군 책임론’을 펴기도 했다. 이 주장은 13년 뒤 “서울과 워싱턴의 미국 관리들이 광주항쟁 이전에 특전사 부대의 사용계획을 알고 승인했다”는 팀 셔록 미 탐사 전문기자의 보도로 사실로 드러났다.
평전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1968)라는 한국에 대한 고전적 저작을 쓴 헨더슨의 ‘한국 공부’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도쿄 외신기자 클럽에 비치될 정도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는 외국인들이 한국 역사와 정치, 문화에 접근하는 필독서이죠.” 그는 “헨더슨이 1957년에 쓴 ‘정다산-한국 지성사 연구’ 논문은 당시 다산 전문가 이을호 교수의 치하를 받았고 1958년에 두 편으로 나눠 쓴 논문 ‘한국유교 약사’는 동양사상가인 고 기세춘 선생에게 지적 충격을 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1958년 강진에서 헨더슨 강의를 들은 기 선생께서 ‘나는 조선인인데도 서양인보다 유교의 가르침을 모르고 있다’고 개탄했다더군요.”
한국 도자기 애호가였던 헨더슨은 1974년 이후 ‘한국 문화재 불법반출 논란’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박정희 시대 ‘관변학자’인 이선근 한국문화재보호협회 회장이 1974년 6월18일 기자회견을 열어 헨더슨이 미국으로 밀반출한 한국 유물이 143점에 이른다고 폭로한 게 그 출발이었다. 이 유물은 나중에 하버드대 새클턴 박물관에 기증돼 보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헨더슨의 수집과 반출은 당시 기준으로 문제가 없었다”며 “헨더슨이 미 의회가 남한 인권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뉴욕타임스>에 기고하고 불과 20일 뒤 이선근 회장이 기자회견을 연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헨더슨에게 문화재 밀반출 혐의를 덧씌우려는 유신 정권의 모략이 이 회장 회견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헨더슨은 1950년에 쓴 정치비망록에서 이승만 체제 대안으로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시도한 ‘김규식과 안재홍 그룹’을 거론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9번이나 투옥돼 무려 7년3개월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의 손녀 사위이다.
중도파가 이승만의 대안이 될 수 있었을까? 김 교수는 “미국이 적극 거들면 가능했을 것”이라면서 덧붙였다. “미국은 전후 일본에서 비군사화와 민주주의를 최우선 정책 순위로 삼았지만 한국은 북한의 남침도 겹치면서 이승만 등 독재 정권과 타협했어요. 이 때문에 미국의 대한 정책을 두고 ‘다리 없는 괴물’이라는 혹평도 나왔죠. 미국의 대한 정책 실패가 오랜 기간 한국 민주주의와 의회주의 실패로 이어졌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