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
유기쁨 지음 l 눌민 l 2만8000원 생태철학·환경윤리 연구자 유기쁨씨가 쓴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는 애니미즘을 생태학적 상상력의 중심으로 삼아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과 협력의 길을 찾는 책이다. 애니미즘(animism)은 ‘생명·숨·영혼’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를 뿌리로 한 말이다. 애니미즘이라는 말을 처음 내놓은 사람은 영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1832~1917)인데, 타일러는 1871년 펴낸 <원시문화>에서 동물과 식물과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애니미즘’이라고 불렀다. 타일러 논의의 핵심은 ‘원시문화’에서 발견되는 애니미즘이 모든 종교의 바탕이며, 이 원초적인 믿음이 발달하여 마지막에 유일신 종교가 됐다는 것이다. 타일러가 보기에, 원시문화의 애니미즘은 종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원형이었고 당시의 지적 수준에서 완전히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초기 과학’이었다. 그러나 근대 과학으로 무장한 서구 세계는 애니미즘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낡은 믿음으로 간주하고 밀어냈다. 지은이는 여기서 사고의 역전을 시도한다. 서구의 근대가 만들어낸 문명이 생태와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면, 그 문명이 비합리·비과학이라고 매도한 애니미즘이야말로 반생태적 근대 문명의 대안을 찾는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브뤼노 라투르, 자크 데리다, 도나 해러웨이를 비롯해 이런 역발상을 시도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참조하고, 남북아메리카·오세아니아 원주민 문화와 고대 인도에서 발생한 자이나교 같은 근대성 바깥의 문화를 살펴 애니미즘의 생태적 상상력을 펼쳐낸다. 애니미즘은 동물과 식물, 더 나아가 강물과 바위 같은 사물이 모두 살아 있으며 인간과 영적으로 교류한다는 믿음이다. 이 모든 것들이 살아 있다면 인간만 사람이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 사람이란 ‘살다’에서 나온 말이므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동물은 동물-사람이고 나무는 나무-사람이며 바위는 바위-사람이다. 이렇게 사람으로 부를 경우, 이 모든 비인간 존재들은 그 자체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정받게 되고 인간과 동등하게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는 존재로 존중받게 된다. 그렇다면 생명체를 먹는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이 살아가려면 다른 동식물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육식을 그만두고 채식만 한다고 해도 사정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뭇 존재를 인격으로서 존중하는 것과 그 뭇 존재를 먹어야 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지은이는 말한다. “세계 각지의 애니미스트 원주민들은 세상의 뭇 존재의 생명성을 존중하는 것과 그 생명을 취하는 것 사이의 불가피한 긴장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예컨대 자이나교 수도승들은 땅에 떨어진 과일만 주워서 최소한도로만 먹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지은이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할 때 ‘그 생명체의 허락을 구하고 적절히 취하는 것’을 방안으로 내놓는다. 북미 원주민들은 그런 방식의 취함을 ‘받드는 거둠’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나아가 지은이는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가 <증여론>에서 이야기한 ‘선물 경제’를 인간과 인간 사이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주고받음으로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모스는 말한다. “선물을 받고 답례하지 않으면 그 받은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는 좀더 열등한 상태로 떨어지며, 답례할 생각 없이 받았을 때는 특히 그러하다.” 모스의 말은 더 큰 세계와 관계 맺기에도 적용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 우호적 상호작용에서 벗어난 존재는 사람답지 않은 존재다. “우리는 과연 우리 인간이 비인간 자연과의 관계에서 ‘사람답게’ 행동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지은이는 비인간 존재의 생명성을 포착하고 그 생명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생태적 상상력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인간과 비인간을 ‘사람’으로 묶어주는 상상력의 한가운데서 애니미즘이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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