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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600년 전 ‘조선의 반도체’…중국이 탐낸 닥나무 종이의 역사

등록 2023-05-26 05:00수정 2023-05-26 12:52

[책&생각]
외발뜨기·도침 등 당대 최대 기술력
휴지·환지 등 제도화된 재활용까지

장인들의 생존 전략, 생태계 영향 등
복잡한 환경·사회·과학기술적 맥락
닥나무를 찌고, 껍질을 벗긴 뒤, 희고 섬유질이 풍부한 속껍질을 씻고 햇볕에 말려 더욱 하얗게 만드는 닥종이 제작 과정. 푸른역사 제공
닥나무를 찌고, 껍질을 벗긴 뒤, 희고 섬유질이 풍부한 속껍질을 씻고 햇볕에 말려 더욱 하얗게 만드는 닥종이 제작 과정. 푸른역사 제공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이정 지음 l 푸른역사 l 2만2000원

과학기술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바꾼다. 자동차를 비롯한 온갖 탈것들이 세계를 좁혀놓더니, 스마트폰은 세계를 손바닥 안에 올려놓았다. 챗지피티(ChatGPT)는 이제 소설까지 뚝딱 써낸다. 지난 100여 년의 과학기술 발전은 눈부시지만, 사실 인류는 태초부터 과학기술의 변화와 발전에 기대어 살아왔다. 연장이나 무기의 발전은 곧 인류 삶의 변화 그 자체 아니던가.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의 <조선의 과학기술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온 ‘나무’ 하나와 그것을 활용해 삶을 변화시킨 ‘과학기술’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그 나무는 바로 닥나무이며, 닥나무에서 종이가 되기까지 발현된 과학기술은 조선은 물론 인접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은 “닥나무를 주인공”으로 쓴 “한반도의 제지 역사”이다.

저자는 닥나무를 “조선 제지의 반도체”라고 정의한다. 그만큼 “복잡한 환경적, 사회적, 과학기술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은 종이의 재료로 대나무, 삼, 삼베 조각을 선택했지만, 한반도에서 종이를 만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산 중턱 자투리땅에서도 잘 자라고, 탁 하고 부러진 속에 희고 긴 섬유질 내피가 있는” 닥나무를 선택했다.

중국·일본에 없던 기술

이미 신라시대부터 “중국인들의 상찬을 받은” 한반도의 종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확고한 기술력을 보여주었다. 건국 초기 명나라 사행 때 수백 장 정도만 조공을 보냈지만, 태종대에 이르러서는 2만여 장으로 늘었고, 세종 당시인 1440년에는 금은의 조공은 줄이고 후지(厚紙) 3만5000장을 요구했다. 1425년에는 “중국 황제가 조선 왕 세종에게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적은 글’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한반도에서 종이를 만드는 재료로 써온 닥나무. 푸른역사 제공
한반도에서 종이를 만드는 재료로 써온 닥나무. 푸른역사 제공

중국 황제도 반한 조선 제지의 핵심 기술은 ‘도침’(搗砧)이다. 도침 전 과정인 외발 뜨기(흘림 뜨기)도 중요한 공정 중 하나였다. “종이 뜨는 발틀을 한쪽만 고정해서 섬유를 떠오르게 한 다음 전후, 좌우 모든 방향으로 물을 흘려보내 섬유가 서로 얽히도록” 하는 방식인 외발 뜨기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기술이었다.

힘들고 숙련을 요하는 방법이었지만 “섬유의 얽힘에 의해 종이가 훨씬 단단해지는” 과정이었다. 이후 “종이를 쌓아놓고 다듬이질하듯 두드리는” 도침이 이어졌다. 밀도는 높아졌고, 그만큼 종이는 단단해졌다. 중국 황제가 탐낸 종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외발 뜨기, 도침 등 고된 노동을 감내한 제지 장인들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글을 썼던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지 장인들은 기지(機智), 즉 “경우에 따라 재치 있게 대응하는 지혜”를 활용하며 시대의 파고를 넘었다.

일의 고됨을 때로는 “과장스럽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방법으로, 때론 “나쁜 종이를 만들어” 종이에 대한 감각이 섬세하지 않은 양반들을 기만하는 식으로 풀었다. 종종 줄행랑을 쳐 산속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조선 후기 가장 높은 공임을 받는 고급 기술자로 대우 받기까지 제지 장인들은 목숨을 건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종이를 뜨고 말리고 다듬으면서 얻게 된 닥종이의 사물적 특성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조절해서 구현하는 기술을 통해 결국 그 사물적 기지에 대한 확실한 인정을 얻어냈다.”

낙방 답안지 모아 외투로…솜보다 나았다

조선의 제지 장인들은 사용한 종이를 재활용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한 번 쓰고 난 문서”를 이르는 “쉬는 종이”인 휴지(休紙)는 장인들의 손을 거쳐 “돌아온 종이”인 환지(還紙)로 거듭났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삿갓의 재료, 나아가 “군인들의 밥그릇과 방석”, “여행용 물병과 가방”, “새색시의 요강”으로 재탄생했다.

과거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의 답안지인 낙폭지(落幅紙)를 면포로 싸서 만든 “낙폭지 외투”는 변방 군인들의 추위를 막아주었다. “휴지 따위를 준다는 불평은 없었다. 솜보다 낫다는 것이었다.”

세종 당시 군기감에서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갑옷이 “쇠사슬로 만든 갑옷, 쇄자갑(鎖子甲)보다 가볍고 화살과 창을 막는 데도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며 종이 갑옷 제작을 주도했다. 이쯤 되면 한반도의 종이는 ‘못 만드는 것 빼고는 다 만들 수 있는’ 당대 최첨단 기술력의 산물이었음에 분명하다. 

종이를 이용해 만든 다양한 공예품들. 왼쪽부터 지승 술병, 팔각표자, 합환주 술잔.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푸른역사 제공
종이를 이용해 만든 다양한 공예품들. 왼쪽부터 지승 술병, 팔각표자, 합환주 술잔.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푸른역사 제공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관찬 지리지를 통해” 닥나무 관련 정보를 생산했다. 다만 조정의 닥나무에 대한 관심은 “특정 지역에서 어떤 닥나무가 자라고 있는지”가 아니라 “관공장의 제지를 가능하게 하는 가공된 재료가 어느 지역에서 조달될 것인지”, 즉 종이라는 결과물에만 집착했다.

그러다 보니 “닥 공물에 따르는 노역”을 피하기 위해 닥밭을 태워 저항하는 백성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삶의 자리를 버림으로써 이주자가 되었는데, 일부는 조선시대 탄압받던 “절에서 같이 살며 제지 기술을 전수하고, 함께 이동하고, 새로운 곳에 같이 정착하며” 종이를 만들었다. 삼남의 종이 생산이 18~19세기 큰 증가세를 보인 데는 이런 이유가 숨어 있다.

물론 닥나무와 함께 이동했던 이주자들의 실책도 적지 않다. 숲을 불태우고 해안을 간척하며 환경에 압력을 가했다. 특히 화전은 “산의 저수 능력을 줄여 산 아랫마을의 농사에 영향을 미쳤고, 인삼이나 약초의 수확량과 품질에 문제”를 야기했다. 그들이 사용한 다양한 도구, 편의를 위해 낸 길 등이 생태계를 변화시킨 것이다. 야생동물이 먼저 피해를 입었고, 궁극에는 사람들의 삶마저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저자는 닥과 장인을 포함해 “연대를 맺은 참여자 대부분”이 “닥나무의 가치를 이해하고 아끼는 가운데 오랜 시간 길러진 기지”를 작동시키면서 생태계의 순환에 일조했다고 평가한다. 현대의 산업들은 과연 이러한 경지를 이뤄낼 수 있을까?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보면 비관적이다. <조선의 과학기술사>는 닥나무와 제지 장인들의 역동적 변화를 통해 조선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면서도, 오늘 우리 시대의 과학기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가치를 담보한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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