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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망국의 그늘에서 해방의 의연함까지 [책&생각]

등록 2023-05-26 05:00수정 2023-05-26 11:06

소설가 김남일 ‘문학기행’ 4부작
서울, 평안도, 함경도, 도쿄 대상

문학작품과 무대, 사회상 다뤄
“북녘 기행 꿈 이룰 날 기다려”
‘한국 근대 문학 기행’ 4부작을 낸 소설가 김남일이 <서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서대문형무소 담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김남일 제공
‘한국 근대 문학 기행’ 4부작을 낸 소설가 김남일이 <서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서대문형무소 담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김남일 제공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서울 이야기·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도쿄 이야기
김남일 지음 l 학고재 l 각 2만원

“김남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할 만큼의 작업을 이뤄놓았다. 그러니 이런 책은 너무 귀해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난다.”

소설가 김남일이 네권짜리로 내놓은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시리즈를 두고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풍부한 문학사적 지식, 근대와 고투한 문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 남다른 인문적 식견, 인간과 시대를 바라보는 곡진한 마음”(권성우 숙명여대 교수, 추천사)이 담긴 책들을 읽으면 방 교수의 그 말이 과장이나 호들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로 나뉘어 각 400쪽 안팎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부터가 지은이의 공력을 짐작하게 한다.

대동강을 건너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대동문. 평양성의 동문이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1925년경 목판화. 학고재 제공
대동강을 건너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대동문. 평양성의 동문이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1925년경 목판화. 학고재 제공

문학 기행이란 문학 작품의 무대나 발상지를 발로 밟아 작품과 현장의 관계를 확인하는 행위다. 그러나 지금은 가기 힘든 휴전선 북쪽이 포함된 이번의 문학 기행은 실제 답사가 아닌, 책과 자료를 수단 삼는 간접 기행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부제에서 밝힌 ‘근대’란 조선의 망국 전야에서 1945년 해방까지를 가리킨다. 김남일은 서울과 평안도, 함경도, 도쿄 등 네 지역을 배경 삼아 한국의 근대와 문학이 만나는 양상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듯 친근하게 서술되는 문장을 좇다 보면 어느새 문학과 시대의 관계를 보는 눈이 트이게 된다.

<서울 이야기>의 첫 장에 소개된 유진오 단편 ‘창랑정기’는 시리즈 전체의 출발로도 읽힌다. 당인리에서 가까운 서강 낭떠러지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 퇴락한 저택 창랑정과 그 주인 서강 할아버지는 몰락을 향해 가는 조선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하다. 서울 편 제5장 ‘한국이 사라진 날’에 소개된 염상섭 단편 ‘김의관 숙질’은 순종의 농사 시범(친경)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귀환이 겹치는 하루를 배경 삼는다. 학교에서는 순종의 친경에는 반장과 부반장만 보내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남대문역으로 나가 통감을 맞이하라는 지시를 내리는데, 주인공인 소년 진하가 그에 불복하며 씩씩거리는 모습이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그것이 1909년 5월이었고, 이토는 그해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쏜 총에 절명했지만, 그것이 조선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이렇듯 망국의 그늘에서 시작해야 했다는 것이 한국 근대 문학의 얄궂은 운명이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최남선은 1908년 구리개 큰길가에 인쇄 공장을 지닌 출판사 신문관의 문을 열었고 그해 11월 한국 최초의 종합 월간 교양지 <소년>을 창간한다. 그때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새로운 문학에는 새로운 매체와 환경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는 최남선에게 적잖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고 김남일은 쓴다. <서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 한국 근대 문학이 사회 변화를 반영하고 때로는 그것을 추동하는 양상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1896년 동갑내기 신여성 김명순과 나혜석이 삶과 글로 아울러 드러낸 여성의 자각과 시련 및 분투,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사내를 연인으로 둔 누이동생을 격려하는 임화의 시 ‘네거리의 순이’, 철거가 예정된 낙산 일대 토막촌을 배경으로 한 현덕의 중편소설 ‘군맹’ 등에 묘사된 도시 빈민의 삶, 산책자 박태원과 몽상가 이상의 모더니즘을 거쳐 일제 말의 암흑기와 해방의 기쁨까지 반세기 남짓 서울 문학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기생들. 김동인의 단편소설 ‘눈을 겨우 뜰 때’의 주인공 기생 금패도 이런 식의 뱃놀이를 자주 했다. 사진 출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학고재 제공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기생들. 김동인의 단편소설 ‘눈을 겨우 뜰 때’의 주인공 기생 금패도 이런 식의 뱃놀이를 자주 했다. 사진 출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학고재 제공

<평안도 이야기>와 <함경도 이야기>는 각각 평안도와 함경도로 무대를 옮겨 서술되는데, 실제 접근성이 떨어지는 만큼 상상력과 해석의 여지는 오히려 풍부해진다.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에는 서울 못지않게 평양 역시 중요한 무대로 등장한다. 주인공 영채의 아버지와 두 오빠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곳이 평양이었고, 그들을 뒷바라지하고자 영채 자신이 기생이 된 곳 역시 평양이었다. 게다가 그가 기생이 된 일 때문에 아버지와 오빠들은 모두 감옥에서 자진하고 만다. 평양은 기생으로도 유명한 곳이어서 김동인의 단편 ‘눈을 겨우 뜰 때’의 주인공 금패를 비롯해 김남천의 단편 ‘남매’ 등에도 기생이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김동인의 잘 알려진 단편 ‘감자’는 평양성의 북문인 칠성문 밖 빈민굴에 사는 복녀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김사량의 일본어 단편 ‘기자림’도 칠성문 일대의 빈민굴을 배경으로 한다.

평안남도 성천의 명물 동명관과 강선루. 성천 출신인 소설가 김남천의 애향심은 남달라서, 자신의 장편 &lt;사랑의 수족관&gt;에는 운전수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포함시켰다. “평양의 모란봉이 좋다고들 하지만 여기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학고재 제공
평안남도 성천의 명물 동명관과 강선루. 성천 출신인 소설가 김남천의 애향심은 남달라서, 자신의 장편 <사랑의 수족관>에는 운전수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포함시켰다. “평양의 모란봉이 좋다고들 하지만 여기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학고재 제공

평안도 출신 시인 김소월의 시들에 영변, 진두강, 정주 곽산, 삭주구성 같은 평안도 지명이 여럿 나온다면, 함경도 동북쪽 끝 서수라를 배경으로 한 이태준의 단편 ‘오몽녀’에 나오는 대사는 잃어버린 북방을 향한 그리움을 한껏 자극한다. “무쉴에 객보르 앙이 함둥? 쇠쟁(所長)이 뇌했습데. 아무렇거나 내 좋을 대루 말하겠으꼬마. 쉬얼히 뇌히겠습지. 과히 글탄으 마십껑이.”

함흥 시장 풍경. 장 보러 온 인파가 만세교를 가득 메우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학고재 제공
함흥 시장 풍경. 장 보러 온 인파가 만세교를 가득 메우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학고재 제공

평안도와 함경도 너머 만주는 한반도를 벗어나 새 삶을 모색했던 선조들이 꿈을 파종한 땅이기도 했다. 안수길의 장편 <북간도>에 나오는 이런 묘사를 보라. “쟁기나 보습, 괭이로 파 뒤집으면 시커먼 흙이 농부의 목구멍에 침이 꿀컥하고 삼켜지게 했다. 씨를 뿌리기만 하면 곡초가 저절로 쑥쑥 소리라도 들릴 듯이 자라 올라갔다.” 그러나 김만선의 단편 ‘이중국적’에서 보다시피 해방이 되자 만주의 조선인들은 오히려 중국인들의 폭력과 약탈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었다. 소설가 허준은 ‘이중국적’의 주인공 박노인과 마찬가지로 창춘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그의 자전적 중편 ‘잔등’에서 주인공은 청진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국밥집 주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공장에 다니던 아들이 감옥에 잡혀 갔다가 해방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죽어서 나왔노라는 그 할머니는 그럼에도 거지꼴로 피난길에 나선 일본인들에게 국밥을 베푸는 것이었다. 국밥집에 까물거리던 잔등과도 같은 할머니의 그 거룩한 마음, “할머니가 일본인 피난민들에게 말아 주던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있어서 우리의 해방은 참으로 의연한 어떤 것일 수 있었다”고 김남일은 함경도 편을 마무리한다.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의 명태 덕장. 일하는 이들이 사진을 찍는 사료 조사관 앞에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학고재 제공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의 명태 덕장. 일하는 이들이 사진을 찍는 사료 조사관 앞에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학고재 제공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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