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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동서 사상의 만남 아우른 본격적인 세계철학사

등록 2023-05-26 05:01수정 2023-05-26 08:56

일본 철학 연구자들 대거 참가
2600년 철학사 대장정 완수

유럽과 북미 중심 벗어나
아시아‧오세아니아‧남미까지 포괄

세계철학사(전 9권)
이토 구니타게, 야마우치 시로, 나카지마 다카히로, 노토미 노부루 책임편집 l 이신철 옮김 l 도서출판b l 각 권 3만원

일본의 철학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해 2020년 내놓은 <세계철학사>(전 9권)가 이신철 가톨릭관동대 교수의 번역으로 나왔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전공자 115명이 대거 합류해 해당 영역의 집필을 맡았다. 집필진은 이 저작을 일본에 서양 철학이 들어온 지 15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감행한 본격적인 ‘세계철학사’ 구축 시도라고 자평한다. 일본 철학계가 축적한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야심 찬 작업이다.

<세계철학사>는 서구 철학사뿐만 아니라 중근동‧인도‧중국‧한국‧일본의 철학사를 아우르고, 그동안 거론되지 않던 아프리카‧오세아니아‧라틴아메리카, 심지어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세계철학사의 시야에 담았다. 기원전 6세기부터 21세기의 오늘까지 인류가 창출한 철학적 사유를 망라했다. 더 주목할 것은 철학사 서술 방식이다. 철학적 사유의 흐름을 문화권마다 살펴 따로따로 나열하던 종래의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공동의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각각의 사상을 횡으로 비교함으로써 세계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동시대 철학적 사유의 공통성과 독자성이 드러나도록 했다.

그런 성취를 먼저 보여주는 것이 제1권에서 서술하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인도의 만남’이다. 이 만남의 출발점이 된 것은 동서 문명의 혼효를 일으킨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56~323)의 동방 원정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군은 기원전 330년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뒤 기원전 326년 인더스강을 건너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로스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알렉산드리아)를 세웠는데,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의 접경지역에까지 알렉산드리아가 들어섰다.

동방 원정으로 동서 사상의 혼효를 일으킨 알렉산드로스 대왕. 위키미디어 코먼스
동방 원정으로 동서 사상의 혼효를 일으킨 알렉산드로스 대왕. 위키미디어 코먼스

알렉산드로스가 이끈 원정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카리스테네스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도 동행했고,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의 창시자인 피론(기원전 360~270)도 이 무리에 들어 있었다. 3세기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서 피론이 ‘인도의 벌거벗은 현자’와 교류한 뒤 회의주의 사상을 얻어 돌아왔다고 썼다. <세계철학사> 집필자는 피론이 인도에서 자이나교 승려나 불교 승려를 만났을 가능성은 크지만 그 승려들에게서 회의주의를 전수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모든 진리의 파악 가능성을 부정한 피론과 달리, 자이나교나 불교는 윤회와 해탈이라는 진리를 확고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오게네스가 “피론은 인도 사람을 만난 뒤 세속에서 물러나 고독하게 살았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피론이 숲속에 살던 인도 승려들의 탈속적 생활방식을 따라했을 가능성은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시작된 동서 사상의 만남을 보여주는 더 극적인 장면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재위 기원전 268~232)이 남긴 ‘비문’이 보여준다. 아소카왕은 이웃나라와 전쟁하던 중 수십만 사망자를 낸 뒤 크게 후회하고 군사적 통치를 포기했다. 불법에 귀의한 아소카왕은 불교 통치 이념을 돌기둥과 바위벽에 새겨 동쪽의 네팔에서 서쪽의 아프가니스탄까지 널리 알렸는데 지역의 특성에 맞게 여러 언어로 번역해 기록했다. 그 비문 가운데 195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비문은 동서 사상의 교합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눈길을 끈다. 그 비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왕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보이고 살생을 삼가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예전에는 살생을 억제하지 못하던 사람들(왕의 신하들)도 지금은 억제하지 못함을 멈추었다.’

그리스어 번역자는 ‘불법’(다르마)을 경건‧신성‧종교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우세베이아’(eusebeia)로 옮겼다. 인도 사상의 핵심 어휘가 그리스 철학 어휘로 처음 번역된 셈이다. 이어 주목할 단어는 ‘아페케타이’(삼가다)라는 말이다. 이 단어의 명사형 ‘아포케’(삼감)는 살생을 금하는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쓰던 말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불교도처럼 윤회를 믿었다. 그리스어 번역자는 이런 유사성을 염두에 두고 피타고라스학파의 말을 빌려 번역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이 ‘아크라테이스’(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라는 말이다. 아크라테이스는 ‘나쁜 줄 알면서도 쾌락에 이끌리는 무절제한 사람들’을 뜻하는데, 소크라테스 이래로 그리스 철학에서 반복해서 논의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또 ‘억제하지 못함’을 뜻하는 ‘아크라시아’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서 쓰던 말이어서 이 번역자가 그 학파와 관련 있는 사람임을 짐작하게 한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아크라시아’에 해당하는 단어가 인도 팔리어 비문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이 단어는 팔리어 비문을 직역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어 번역자의 독자적인 해석이 담긴 말이다. 이 비문에서 불교 사상과 그리스 사상이 섞이고 있는 셈이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는 알렉산드로스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다. 아소카왕의 그리스어 비문은 그 그리스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다.

그리스와 인도 사이의 더 직접적인 교합을 보여주는 문헌도 있다. <밀린다왕의 물음>이라는 경전인데, 밀린다왕은 기원전 2세기 중엽에 그리스계 왕국 박트리아를 통치한 메난드로스를 가리킨다. 메난드로스가 불교 승려 나가세나(나선)와 나눈 대화의 기록이 <밀린다왕의 물음>이다. 이 문헌은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구성돼 있는데, 불교 사상의 큰 쟁점인 ‘무아와 윤회의 관계’가 대화의 중심을 이룬다. 그리스적 사유에 익숙한 메난드로스는 ‘유아론’의 관점에서 묻고, 나가세나는 불교 사상에 기초해 물음에 답한다. 나가세나가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무아론, 곧 ‘인격적 주체’인 ‘풋갈라’(나, 자아)는 인연을 따라 구성된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무아론에 대해 메난드로스는 ‘그렇다면 윤회는 누가 하는 것이냐, 만약 윤회의 주체가 없다면 악업에 대한 응보는 누가 받는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 이 대화편은 애초 그리스어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후에 팔리어로 번역된 뒤 다시 <나선비구경>이라는 제목으로 한역됐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각각 관심사가 다르기에 일치점에 이르지 못하고 끝난다. 그리스 사상과 인도 사상에 공통으로 속하는 <밀린다왕의 물음>이야말로 ‘세계철학’이 처음으로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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