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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아랍 학자들 없이 과학 지식의 전승 없었다

등록 2023-06-09 05:00수정 2023-06-09 09:56

영국 역사학자의 ‘과학 지식의 역사’
고대의 수학·천문학·의학 지식
일곱 도시에서 어떻게 이어져왔나

관용·포용·협력, 가장 중요한 조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 13세기 아랍 그림. 마농지 제공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 13세기 아랍 그림. 마농지 제공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
바이얼릿 몰러 지음, 김승진 옮김 l 마농지 l 2만5000원

기원전 300년께를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는 무려 2300년이란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고 오늘날의 학교에서까지 통용되는, 가장 위대한 수학 교과서를 썼다. 유클리드 <원론>을 통해 수학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고 증명 가능한 원리들로 이루어진 분야”가 됐고 다른 과학들에도 토대를 제공했다. 유클리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에 세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가 연구를 했다고 추정되는데, 전세계의 온갖 지식을 그러모으려 했던 이 도시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활용해 고대 천문학을 집성한 프톨레마이오스, 다양한 저술로 해부학을 비롯한 광범위한 의학 지식을 남긴 갈레노스도 있었다. 이들이 이룬 성취는 책(파피루스)에 담겨 끝내 오늘날까지 전해졌으나, 그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험난한 것이었다.

영국 역사학자 바이얼릿 몰러는 <지식의 지도>에서 서기 500년부터 1500년 사이 과학 지식이 어떻게 전승됐는지를 탐구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아테네의 뒤를 이은 ‘문화의 중심’이었고 ‘국가가 후원하는 학문’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만들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천 년 동안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교’의 지식은 불태워지고 자취를 감췄다. 프톨레마이오스가 150년께 파피루스에 썼을 그의 대표 천문학 저작 <알마게스트>의 예를 들어보자면, 그것이 1500년까지 전승되려면 최소 다섯 번은 새롭게 필사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천 년에 이르는 유럽의 ‘공백기’ 동안 도대체 어디에서 누가 과거의 과학 문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필사하고 전파하는 일을 맡았을까? “그리스 과학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게 했고, 그리스 과학을 인도 등 여타의 곳에서 유래한 학문 및 자신이 직접 수행한 연구와 결합해 탁월하게 변모시켜”낸 것은 대체로 아랍의 학자들이었다.

13세기에 알 하리리가 새로 제작한 버전의 &lt;마카마트&gt;에 실린 아랍 도서관 정밀화. 마농지 제공
13세기에 알 하리리가 새로 제작한 버전의 <마카마트>에 실린 아랍 도서관 정밀화. 마농지 제공

지은이는 시대순으로 일곱 개의 도시를 따라가며 수학, 천문학, 의학 지식이 전승된 역사를 풀어나간다.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이킹이 쳐들어올까 두려움에 떨며 순무로 끼니나 겨우 때우던 시절”, 알렉산드리아의 뒤를 이어 과학 지식을 꽃피운 곳은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9세기)였다.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경영하는 통치자들은 국가가 학문을 후원하는 전통에 따랐고,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그리스뿐 아니라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 등 고대 세계의 지식이 집성됐고, <알마게스트> <원론> 등의 핵심 문헌들도 아랍어로 번역되어 널리 전파됐다. 인도에서 영(0) 개념이 들어왔고, ‘알고리즘’이란 말의 어원이 된 알 콰리즈미 같은 수학자들이 활약했다. 마누 무사 삼형제는 이 세상의 크기를 재는 실험도 벌였다.

아바스 왕조가 일으킨 혁명에 무너진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부활했는데, 그 수도였던 코르도바 역시 국가의 후원으로 학문이 번성(10세기)했다. 바그다드와 경쟁하면서도 교역했던 곳이기에, 사람·물자의 이동과 함께 과학 지식도 활발히 흘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의학서 <약물지> 등이 들어와 아랍어로 새로 번역됐고, 의사 알 자흐라위는 ‘정맥 수술에 사용되는 절개용 메스’를 만들 정도로 당대 가장 뛰어난 외과술을 구축했다.

이슬람 세계의 과학 지식을 기독교 세계로 전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 도시는, 코르도바에서 300㎞ 북쪽에 위치해 무슬림 세계와 기독교 세계 사이의 관문 구실을 했던 톨레도(11~12세기)다. 이탈리아 크레모나 출신으로 <알마게스트>를 찾아 톨레도까지 찾아온 제라르도는 이곳에서 평생 아랍어본 서적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달려, 아랍 과학이 서유럽에 들어올 수 있는 결정적인 길을 열었다. 이슬람 세계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이자 천문장비 생산자인 알 자르칼리 역시 톨레도에서 활약했다. 유럽 안에서도 지중해 중부 지역은 해상 교역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조건의 영향으로 과학 지식들이 작은 규모로나마 유통됐다. 북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의 의학서들을 들여오고 이를 라틴어로 옮기는 등 의학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던 이탈리아 살레르노가 대표적이다.

이스탄불 갈라타 탑 천문대에서 관측 중인 천문학자들. 지구본, 사분의, 모래시계, 아스트롤라베 등 다양한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16세기 그림. 마농지 제공
이스탄불 갈라타 탑 천문대에서 관측 중인 천문학자들. 지구본, 사분의, 모래시계, 아스트롤라베 등 다양한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16세기 그림. 마농지 제공

&lt;마카마트&gt;에 실린 또 다른 그림으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피부의 일부에 뜨겁거나 찬 기운을 이용해 국지적으로 진공을 만드는 고대 의술인 ‘부항’을 뜨는 모습이다. 마농지 제공
<마카마트>에 실린 또 다른 그림으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피부의 일부에 뜨겁거나 찬 기운을 이용해 국지적으로 진공을 만드는 고대 의술인 ‘부항’을 뜨는 모습이다. 마농지 제공

노르만족 지배층이 지배하게 된 시칠리아의 중심 도시 팔레르모(12세기)에선 라틴 문화가 지배적이었고, 그 영향으로 그리스 고전을 아랍어본 중역이 아닌 직접 번역이 시도됐다. 그리스 원전을 저본으로 삼으며 유클리드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재발견됐다. 이 팔레르모의 모델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전통이 유럽에 들어왔다.” 그 뒤 이탈리아 북부 독립 도시 국가들의 성장은 끝내 이전에 없던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고전으로 되돌아가려는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에 더해, 독일에서 개발된 근대 인쇄 기술이 만개한 것이다. 새로운 꽃이 피운 곳은 해상 교역으로 상업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던 15세기 베네치아였다. 그 스스로가 학자였던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세운 알디네 출판사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갈레노스 전집 등을 그리스어로 출판할 정도로 대담했고, 필사본으로 유통되던 저술들을 인쇄하는 혁신에 힘입어 과학 지식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길이 열렸다.

일곱 개의 도시로 500년의 세계와 1500년의 세계를 이어보며, 지은이는 이 도시들에 “학문이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 조건은 “정치적 안정, 자금과 서적의 지속적인 공급, 학문에 관심 있는 뛰어난 인재들의 유입,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타민족과 타 종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었다. 이를 통해 가능해진 협업이야말로 과학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천 년 동안 그것을 가장 잘해왔던 지역은 주로 아랍 세계였으나, 유럽 세계는 “아랍 학문을 주변화하고 과거로 밀어넣는 서사”를 만들어왔다. 이 책은 그렇게 오랫동안 지워졌던 발자취를 복원해 지식의 역사를 온전하게 새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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