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페미니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위키미디어 코먼스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옮김 l 창비 l 1만6800원 미국 페미니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67)가 쓴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책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던 2020년에 행한 연속 강연을 바탕으로 삼아 지난해 출간했다. 버틀러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지구 전체를 뒤덮어 우리와 이웃의 생명을 극도로 위협하는 상황을 두고 ‘저런 세계란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서 이 책의 제목이 나왔다. 이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으려고 버틀러는 현상학자 막스 셸러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저술을 검토해 ‘팬데믹의 현상학’을 구축해 나간다. 버틀러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 내쉬는 숨이 이웃에게 죽음의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그 상황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끌려 나오는 것이 ‘우리의 생명은 한데 얽혀 있고 서로 엮여 있다’는 통찰이다. “나는 경계 지어진 생물로서 외부로부터 온전하게 봉인된 독립자가 아니다. 나는 다른 이들의 폐를 통과하여 순환해온 공기를 들이마시는 공유의 세계 속에서 다시 내 숨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와 연관돼 있고, 너는 이미 나에게 연관돼 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분명 서로의 신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버틀러는 나의 자유와 이익을 앞세우는 자유주의적 사고는 이런 팬데믹 상황에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팬데믹이 창궐하는 가운데 나의 생명과 너의 생명은 따로 분리돼 있지 않다. 여기서 버틀러는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간다. 팬데믹이라는 재앙에서 사회적·윤리적 교훈을 끌어내는 셈인데, 그 교훈을 버틀러는 이렇게 정리한다. “무엇이 삶을 살 만하도록 만드는가 하는 물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결코 배타적으로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우리 삶은 서로 엮여 있고 서로 공유되고 있지만, 팬데믹 상황을 둘러보면 무수한 불평등이 그 엮임과 공유를 가로지르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피해는 과거 선진국의 식민지였던 가난한 나라들에서 특히 극심하다. 선진국은 백신의 개발과 보급으로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하다. 그런가 하면 한 나라 안에서도 피해의 규모는 계급이나 인종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유색인종의 감염 확률이 백인보다 세배, 사망 확률은 두배나 높다. 죽음을 애도하는 일에서도 불평등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미국 시민이고 백인이고 재산이 있는 이들의 죽음은 미등록 이주자이거나 유색인종이거나 가난한 이들의 죽음보다 더 깊은 애도를 받는다. 그러나 팬데믹은 우리가 모두 생명으로 엮여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나’는 타자들의 지지와 그들과의 동행이 없이는, 삶의 과정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살아 있는 생물들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적 기제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바이러스는 이런 얽힘과 엮임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내 생명과 다른 이들의 생명을 지키려면 팬데믹의 위험을 키우는 극심한 불평등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의 ‘나’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이기도 하다”는 명제야말로 팬데믹의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버틀러는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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