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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은 ‘위안부’ 진실 밝힐 수 있나 [책&생각]

등록 2023-06-16 05:01수정 2023-06-16 10:31

역사 문해력 수업
누구나 역사를 말하는 시대에 과거와 마주하는 법
최호근 지음 l 푸른역사 l 2만원

서양사학자 최호근 고려대 교수가 쓴 <역사 문해력 수업>은 역사를 이해하는 법을 안내하는 책이다. 지은이는 “무엇 때문에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말해주는 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오던 터에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한다. 전체 8장에 걸쳐 29가지 주제를 강의하듯 친절하게 서술했다.

역사학자로서 지은이의 고민이 가장 깊이 묻어나는 곳은 ‘객관적 역사서술의 꿈’을 다룬 제7장이다. ‘과연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최근 역사학계의 가장 큰 물음이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여기서 주목하는 역사가들은 ‘역사학이란 무질서한 사실들의 더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 20세기의 역사가들, 그중에서도 지난 수십년 사이에 역사학의 분위기를 바꾼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역사란 무엇인가?’ 하고 묻지 않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하고 묻는다. 똑같은 사안을 놓고도 사람마다 국적·종교·인종·젠더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본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역사 자체는 없고 특정한 당파성에 기초한 역사 해석만 있을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은 종래의 역사학계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했던 ‘역사학의 전제’를 의심하고 뒤집어본다는 점에서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과거의 서구 주류 역사학계는 자신들의 입론을 떠받치고 있던 서구중심주의나 남성중심주의를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은이가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전제를 의심하고 해체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사실 자체, 진리 자체를 부정하고 거부함으로써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불러오기에 이른다. 여기서 지은이는 묻는다. “객관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극단적) 상대주의 이후에 우리에게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 태도가 인간 삶의 다양성과 다성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길러주는 긍정적인 면모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를 끝까지 밀고갈 경우 어떤 예기치 못한 결과가 빚어질지도 함께 따져봐야 한다.

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인 ‘사료’의 경우를 보자. 권력자를 위한 기록은 넘쳐나는 데 반해 약자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료의 절대적 비대칭성이 문제가 될 때, 포스트모더니즘 입장에서 역사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료를 해체적 독법으로 읽어내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행간의 의미 읽기나 텍스트의 결을 거슬러 읽는 것만으로 이미 굴절된 과거를 바로 펼 수 있을까?” 지은이가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적 역사 독법은 기존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는 자극을 줄 수 있지만 역사적 진실 자체를 다툴 때는 무력해지고 만다는 본질적인 약점이 있다.

지은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례로 삼는다. “이 반인도적 성격의 국가범죄를 여실히 드러내 줄 수 있는 일본 쪽 공문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피해자 쪽 사문서도 거의 없다. 남아 있는 것은 몇몇 생존자의 증언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에 관한 기록에는 증거적 가치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과격한 주장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에서 나오는 결론은 “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저것도 믿기 어렵다는 식의 양비론”일 수밖에 없고 이런 양비론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 자체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게 된다. 지은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이 진실 자체,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음을 지적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해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해체인가’ 하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극단적 상대주의의 대가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리고 그 피해는 약자들에게 집중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가 지닌 치명적 약점을 넘어 역사학을 재구축해야 할 임무가 역사학자들에게 있는 셈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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