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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거장이 치른 남성주류의 폭력…아픔 삼켜 ‘시하다’

등록 2023-06-23 05:01수정 2023-06-23 09:54

김혜순 시인, 진솔·육중한 필담집
‘여성·동물적 항거’ 독보적 시세계
시학·문학론부터 생애 상처 첫 고백

“시는 강력한 정치이고 저항입니다”
2017년 8월 <한겨레>와 인터뷰 중의 김혜순 시인. 시인은 당시 사진을 이번 책의 표지로 삼았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7년 8월 <한겨레>와 인터뷰 중의 김혜순 시인. 시인은 당시 사진을 이번 책의 표지로 삼았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김혜순 지음, 황인찬 인터뷰 l 마음산책 l 1만8000원

시인 김혜순(68)은 1997년 여성 시인으로 처음 김수영문학상(16회·민음사 주관)을 받았다. 앞서 15명은 모두 남성이었다는 얘기다. 억눌려 은폐되거나 획득하지 못한 여성의 말, 여성의 몸을 ‘여성 동물’의 감각과 리듬으로 침잠하여, 포효하여, 아프게, 우습게 그래서 기이하게 드러내는 시풍의 물꼬를 텄다 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근자에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권박(2019년 38회), 이소호(37회) 등으로까지 이어지는 파장은 김혜순 덕분에 덜 주눅 들었고 더 분방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김혜순의 시는 충분히 친절하지 않고 친절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고분고분한 저항’이란 게 가당한 말인가.

신간 <김혜순의 말>은 45년 가까이 펴낸 시·시론·산문집에 견줬을 때 가장 ‘나긋한’ 주파수로, (여성)시학, 작품론, 문학의 정치성과 같은 고밀도의 주제는 물론, 가정사와 문단 에피소드까지 제 한 생애를 압축하여 구술하고 있다. 시인은 아픔을 삼켜 때로 웃었다. 지난해 1~7월 시인 황인찬(35)과의 필담을 통해서다.

전위적, 독창적 시라는 세평이 확연하고 여성으로서 시 쓰기의 의미를 작가 스스로 표명(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해 왔으나, 그 배경이 구체적 삶을 들춰 포착되진 않았다. <김혜순의 말> 중에서도 ‘여자 김혜순’의 말이 먼저 들린 까닭이다. 당대 시의 거장조차 상처로 맞받을 수밖에 없던 남성·주류·거대담론적 세계의 뭇칼질이랄까, 기존 책에서 볼 수 없는 내용들로 몇 가지 고백만 추리자니 이렇다.

국문과 대학생이던 김혜순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입선한다. 발표 전 심사위원 한 명이 자신의 아파트로 불렀다. 한자를 써보라거나 미술 사조를 캐물었다. 심사 뒤 막상 여대생이 뽑히자 추가 시험을 치른 것이다. 이 여대생의 평론은 뽑되 당선 대신 입선. 김혜순은 “평생 모욕을 기억하고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강원 원주여고를 졸업한 김혜순이 애초 입학한 데는 지역 국립대 국어교육과다. 부모님의 직업이기도 했던 교사가 되는 길이었다. 하지만 요즘 말로 스토킹 피해를 당하며 학교를 옮겨야 했다. 대학교수 땐 학생이 스토커가 되기도 했다. 딸의 고등학교까지 찾아갔다. 이참의 한마디는 김혜순의 오랜 시들에 부친 간결한 주석 같다. “여자들은 늘 쫓기는 꿈을 꿉니다.”

그는 20대 첫 직장생활(출판사) 때 이웃집 가장의 가정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경찰 신고도 했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희곡작가 이강백(76)과 결혼(1980년)한 덴 행여 때릴라치면 더 빨리 도망갈 수 있겠단 점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둘이 가약 맺게 된 감동적 사연(군사정부 시절의 무언극 <개뿔> 관련)은 따로 있기에 시인이 웃어 말한 까닭을 알 만하지만 농담만은 아닌 거다. 대학강사 땐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며 조교가 수업 중 교실문을 두드렸다. 딸을 학과 사무실에 맡겼기 때문이다.

2017년 5·18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피어라 돼지>의 자격 시비와 함께 심사위원과 사적 관계 덕분이란 말이 나돈다(상을 거부했다)거나, 특정 문학상을 여성 시인으로 처음 받을 때마다 “‘살림하고 연탄 가는 여자가’ 같은 구절이 비평 속에 있”었다. 김혜순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문예지 <파라21>(2003년 창간)은 “페미니즘 사상 및 성의 자유, 좌파 사상을 전파한다는 어느 문학 전공 교수의 집요한 투서로 폐간”됐다.

과연 ‘나긋한 저항’이 가능한 시대랄 수 없다. 하물며 상대가 가족주의래도 그렇다.

“…// 글자네 집에서 글자의 아기가/ 입술을 다물었다 펴면서/ 글자 엄마를 데려왔습니다/ 입술을 더 세게 밀착시켜선/ 글자 아빠를 데려왔습니다/ 이번엔 입술을 파열시켜서/ 글자 아파를 데려왔습니다//…// 가구는 그대로인데/ 집은 직선으로 추락합니다// 엄마는 여자의 목소리는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하고//…”(‘아파의 가계’ 부분)

김혜순은 은유와 상징에 비판적이다. 비관적이라야 더 옳겠다. 신의 눈으로 타자를 규정하는 남성적 시 쓰기로 본다. 그가 2000년대 들어 국외에서 호명되는 데 크게 기여한 프랑스 비평가 클로드 무샤르(82)는 “김혜순의 세계에서의 끝없는 반항은 거대하고 은밀한 변신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김혜순이 이른바 “OO하기”와 상통하겠다. “재현이나 비유가 아니라 (사물의) 내재성을 몸소 경험”하는 동물성, 즉 “모든 것을 떨군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시는 감지된다. 이 동물성이 인간계의 여성성이다. 태초의 여성 ‘유령 화자’는 시집 <피어라 돼지>(2016)에서 돼지, <날개 환상통>(2019)에서 새,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서 사막의 몸을 “통과”한다. “시하다”, “새하다”, “여자짐승하다” 등은 비주류, 비현실과 관계맺기를 거듭한 몸들의 존재 상태이고, 이는 ‘나’의 죽음을 전제로 요구한다. 몸과 죽음이 시인 김혜순의 디엔에이(DNA)인 이유다.

이러한 ‘변신·하기’야말로 노벨상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오로지 변신을 통해서만… 우리는 한 존재의 말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처럼 닿을 수 없는 진실에 닿을 수도 있는 도정이 된다. 죽음으로부터 삶을, 비현실로부터 현실을 실감한달까.

그는 1979년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서울예대 교수직에서 퇴임하기까지 30여년간 매해 더 젊어지는 학생들과 시를 탐색했다. 그에게 “시의 원료는 감각”으로 “서사에서 시간적 요소를 제거하면 감각이 오롯이 남”는다. 특히 페미니즘에 있어, 40년 전 김혜순이 발신한 연대의 감각은 시간에 바래지 않아 여태 여기 닿는다.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신발 좀 빌어달라 그러며는요/ 신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부축해다오 발이 없어서 그러며는요/ 두 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달라 빌어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랬죠// 하늘엔 산이 뜨고 길이 뜨고요/ 아무도 없는 곳에/ 둥그런 달이 두 개 뜨고 있었죠”

1981년 첫 시집 <또 다른 별에서>의 ‘도솔가’ 전문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시와 산문의 경계조차 허물며 구축한 독보적 시 세계가 품어온 상처를 시인이 ‘몸소’ 조금 들려줬다. 우린 김혜순의 몸에 빚졌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후기 “어머니가 신 다음이라면 어떻게 산후우울증에 걸리나?”

새길 말들이 적지 않다. “세상의 수많은 단어 중 순결이니 정상이니 하는 단어들을 제일 싫어하지요. 순결이란 애초에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말이고… 있지도 않은 정상에 맞추느라 다 죽을 지경이지요.” “모성이 이데올로기가 되다니요? …어머니는 신 다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신 다음이 산후우울증에 걸린단 말입니까?” “우리나라 문학 교육은 일천하기 그지없습니다. (…) 저는 제 시가 수록된 대입참고서의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말은 이것이었다. “‘사랑하다’는 나를 타자로 만듭니다. ‘시하다’는 ‘사랑합니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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