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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회적 규격에 갇힌 자아의식 깨는 ‘무위인 되기’ [책&생각]

등록 2023-07-21 05:00수정 2023-07-21 10:15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무위인-되기
소운 이정우 지음 l 그린비 l 2만5000원

철학자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의 <무위인-되기>는 지난 10여년 동안 쓴 철학적 에세이 모음이다. ‘주체’와 ‘시간’에 대한 지은이의 오랜 사유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저작이다. 특히 이 책의 맨 앞에 실린 글 ‘무위인-되기’는 지은이의 주체 사유가 도달한 경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치밀한 논리의 집적이다. 지은이는 무위인(無位人), 곧 ‘자리 없는 주체’야말로 참된 주체임을 논증한다.

이 글은 먼저 통상의 주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통상의 주체는 주체에 따라붙는 ‘술어’를 통해 형성되는 주체다. ‘철수는 남자다, 철수는 기독교인이다, 철수는 용감한 사람이다’ 같은 명제에서 주어를 서술하는 ‘남자, 기독교인, 용감한 사람’이 술어다. 이 술어를 철수 자신이 받아들여 ‘나의 술어’로 삼을 때 ‘자기의식’이 성립한다. 이 자기의식이 인간을 주체로 만들어준다.

주체는 자기에게 따라붙는 온갖 술어들의 집합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술어들이 가리키는 온갖 규정들의 계열체가 주체다. 그리하여 철수는 ‘남자, 기독교인, 용감한 사람’ 같은 무수한 규정의 계열을 거느린 사람으로서 주체가 된다. 이런 술어들을 지은이는 ‘이름-자리’라고 부른다. 술어가 대개 이름(명사)으로 나타나고, 그 이름은 사회적 위계의 자리에 속해 있기에 이름-자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규정들의 계열은 동시에 부정과 차이의 계열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의 부정이고, 한국인은 비한국인의 부정이다. 여기서 자기와 타자의 다름(차이)이 불거진다. 이런 구도에서 나의 술어들과 타자들의 술어들 사이의 비교를 통해 자아의식이 형성되고, 이 비교는 나의 술어를 인정받으려는 ‘인정투쟁’을 불러온다. 또 이 인정투쟁에서 경쟁의식이 자라며 경쟁의식은 증오심을 낳고 증오심은 고통을 낳는다. 자신의 술어들 곧 ‘출신, 전공, 직업, 재산, 종교’ 따위에 집착하는 자아의식은 불행한 의식이 된다.

주체가 이 불행한 의식의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이 술어들을 가르는 분절선들이 ‘분절선 이상의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름-자리들의 체계가 존재론적·가치론적 실체가 아니라 자의적 분절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홀연히 깨치는 것이다. 장자는 이 ‘아무것도 아님’을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이치로써 가르쳤다. 이 제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삶을 규격화하던 격자가 깨끗이 치워지고, “무한한 잠재적 질서인 허(虛)”가 도래한다. 이때 우리는 더는 위(位)에 머물지 않는 무위인이 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무위인이란 이름-자리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에 붙들리지 않는 존재다. 그리하여 무위인은 “허의 차원과 현실의 이름-자리 체계 사이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참된 주체는 끝없이 격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동사적 주체다. 그것을 가리켜 지은이는 ‘무위인-되기’라고 부른다. 저마다 무위인이 될 때 진정한 우리-되기도 가능해진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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