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휴가 땐 내 삶의 마지막을 상상하며 ‘나의 부고’ 초안을 써보자.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의 저자 제임스 알(R). 해거티는 나의 부고는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픽 정현선 yoihoi50@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
월스트리트저널 부고 전문기자가 전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
제임스 알(R.) 해거티 지음, 정유선 옮김 l 인플루엔셜 l 1만8000원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서양화가 박수근이 남긴 묘비명이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묘비명은 재치 있고 익살스러운 문구로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묘비명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자신의 묘비엔 뭐라고 쓸지 장난스럽게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그렇게 묘비명을 간단하게 생각해보는 것을 넘어 자신의 부고를 자신이 직접 당장 써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를 쓴 제임스 알(R.) 해거티 기자다.
해거티는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유일하게 부고 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부고 전문기자라는 직함이 국내 독자들에겐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국내 언론은 유명하고 업적을 남긴 사람 중심으로 부고 기사를 쓰고 부음 기사도 유가족 중심으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부터 영미권 언론은 “부고가 범죄 뉴스, 스포츠 소식만큼이나 매력적인 가십성 오락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흥미로운 도입부로 시작하는 부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부고가 인지도에 상관없이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전해주는 ‘미니 전기’로 발전했다. 2016년엔 뉴욕타임스의 부고 담당 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오빗’(Obit)이 제작될 정도로 부고 담당 기자들은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데, 40여년 동안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일해왔고 지난 7년간 총 800명의 부고 기사를 써온 해거티도 부고 전문기자로서 자신의 전문성과 경험을 살려 ‘부고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책을 썼다.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를 쓴 월스트리트저널 부고 전문기자 제임스 알(R.) 해거티. 그는 자신이 쓸 수 있을 때 자기 부고를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로레인 리-해거티 제공
이 책의 미덕은 ‘내 부고나 내 가족, 지인의 부고를 쓴다면 어떤 내용으로 채울까?’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시해주고, 풍부한 예시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문학적 재능이 없어도 저자가 안내하는 대로 하면 ‘부고의 재료’를 충분히 모을 수 있고, 그 재료들을 진주 구슬 꿰듯 잘 엮는다면 나에 관한 ‘작은 책’까지도 만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다. 또 부고를 쓰기 위한 다양한 질문에 답하다 보면 지나온 삶에 대해 돌아보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는지’ ‘내가 만들어나가고 싶은 삶은 어떤 삶’인지 질문하게 된다.
저자는 시종일관 부고는 인생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독자에게 직접 자신의 부고를 써보라는 이유는 기자의 경험에서 나왔다. 부고 기사를 쓰기 위해 가족에게 연락해 고인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해도 명쾌한 답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보나 마나 망칠 것이 뻔한 가족들에게 내 부고를 맡기지 말자”고 단언할까.
부고를 쓰기 위해 저자가 강조하는 기본 질문은 세 가지다.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목표를 이루었는가?’ 부고 기사를 쓸 때도 해거티는 이 세 가지 질문을 기본 뼈대로 한다. 이 질문 외에 그는 기억, 가족, 사랑, 직업, 실수, 믿음 등으로 항목을 나눈 뒤, 항목별로 질문의 예시를 보여준다. 가령 실수 항목에서는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는가?’ ‘인생 최대의 실수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점이 있는가?’ 등을 자신에게 직접 물어보고 글로 써보거나 녹음을 해보라고 말한다. 그 답들은 부고를 이루는 ‘인생 한 조각’이 된다.
부고 또한 대상이 있는 글이므로 사실 확인이 중요하다. 정확한 출생일과 사망일, 태어난 순서, 태어난 곳과 자란 곳, 이름과 직업, 삶에 큰 영향을 준 요인들, 외부 활동, 별난 생각이나 기이한 버릇 등 세부 사항을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저자는 내 기억이나 어머니 말에 의존하지 말고 옛날 신문이나 편지, 각종 자료 등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라고 강조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좋은 부고는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나 실수까지 모두 담고 있는 이야기다. 반면 틀에 박힌 전형적인 내용, 엄숙하기만 한 부고, 찬사나 헌사만 늘어놓는 부고, 디테일이 없는 부고는 피할 것을 권한다. 그는 “장례식에서 최고의 순간, 즉 슬픔을 잠시 내려놓는 순간은 추도사를 낭독하는 사람이 고인의 재미있는 버릇이나 익살스러운 말과 행동을 상기시킬 때 찾아온다”며 “실수나 유쾌한 순간들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또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솔직하고 유쾌한 부고로 캐나다 정치 만화가 마이클 드애더가 2021년 자신의 어머니가 숨진 뒤 쓴 부고를 예로 든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매릴린에 대해 “세상의 모든 아이를 사랑했으나 자신의 친자식들은 얼마나 깨끗하게 면도했는지에 비례해 그만큼만 사랑했다. 손가락 욕을 잘했고, 굴욕을 참지 않았으며, 농담에는 깔깔거리며 웃어주었다”고 썼다. 이처럼 책에는 우리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부터 저자가 직접 쓴 자신의 부고와 저자 어머니, 아버지 부고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시금치를 먹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최고경영자 이야기, 세계 곳곳을 다니며 영어를 가르친 시각 장애인 이야기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읽다 보면 ‘죽음’이 아닌 무지갯빛 ‘삶’을 만나게 된다.
유명한 사람, 악명 높은 사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까지 800여명의 인생 이야기를 취재하며 그는 무엇을 알게 됐을까.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그 이야기는 크든 작든 가르침이 담겨 있으며,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로 낙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여름 휴가철, 시원한 곳에서 이 책을 옆에 놓고 ‘나의 부고 쓰기’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일단 기본 질문 세 가지부터 답해보자.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목표를 이루었는가?’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