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호 토머슨인 일본 요츠야의 ‘순수계단’. 위키미디어 코먼스
초예술 토머슨
아카세가와 겐페이 지음, 서하나 옮김 l 안그라픽스 l 2만2000원
건물 외벽에 계단이 붙어 있다. 그런데 계단의 정점에 있어야 할 출입문이 없다. 그냥 벽이다. 반대로 건물 외벽 높은 곳에 출입문이 나 있다. 아래에는 난간이나 계단 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 날 줄 아는 사람만 그 문을 이용할 참이다. 때론 문 위에 있던 차양이나 문의 일부였던 손잡이가 콘크리트로 발라진 건물 외벽에 외롭게 붙어 있다. 건물이나 건축 환경의 일부였던 것들이 개축 등을 거치며 사라지지 않고 덩그러니 남아 만들어낸 장면들이다.
일본의 현대미술가 아카세가와 겐페이(1937~2014)는 이런 것들에 ‘토머슨’이란 이름을 붙이고, 여기에서 ‘초예술’이란 개념을 끌어냈다. 우리가 사는 ‘당연한 세계’는 쓰임 있는 존재만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한다. 그런데 그게 “‘부동산적 물건’이라면 손쉽게 폐기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세계의 한쪽 구석에 남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을 넘어서는 예술, ‘초예술’이 아니겠냐는 제안이다. 토머슨과 초예술은 1982년 잡지 기고로 알려졌고, ‘토머스니언’을 자처하는 독자들이 도시 곳곳의 토머슨들을 찾아내 ‘보고’하는 등 널리 관심을 끌었다. 토머슨이란 이름은, 높은 연봉을 받지만 헛방망이질만 하며 벤치를 지켰던 메이저리그 출신 야구선수 게리 토머슨으로부터 따왔다.
공중에 덩그러니 남은 회전계단. 이 역시 토머슨에 해당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짐짓 장난스럽게 과장되어 있지만, ‘노상관찰학’으로 발전한 토머슨은 심오한 문명 비판을 담고 있다. 초예술은 “문명 안에 먼저 빈핍성, 즉 궁상맞은 성질이 생겨나 있지 않으면 파생되기 어렵다.” 그리고 ‘궁상맞은 성질’은 세상 모든 것을 ‘쓸모 있는 것 아니면 쓰레기’로 구분해버리는 인간 문명의 한계와 허술함에서 온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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