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베를린에서 지휘하는 친일음악가 안익태. 한겨레 자료사진
안익태 애국가와 트로트
이해영·김정희·신현국·박영금·강태구 지음 l 가갸날 l 1만5000원 국가(國歌)만들기시민모임 공동대표인 이해영(한신대 교수)과 음악 연구자 네 사람이 함께 쓴 ‘친일의 오늘’은 부제가 가리키는 대로 ‘안익태의 애국가와 트로트’를 친일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이해영은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안익태(1906~1965)의 친일 행적을 밝힌 책 ‘안익태 케이스’를 연전에 펴낸 바 있다. 이해영은 ‘친일의 오늘’의 서설을 이루는 ‘안익태 애국가와 국가상징’이라는 글에서 안익태의 애국가가 국가상징으로 쓰이는 것의 문제점을 파고든다. 이 글은 같은 친일 음악인이라 하더라도 홍난파의 경우와 안익태의 경우는 그 수용성 차원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낸다는 점을 강조한다. 홍난파의 ‘가고파’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안익태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행위라는 것이다. “하나는 ‘사적’ 향유에 해당하는 데 반해 다른 하나는 일정한 강제성이 수반되는 ‘공적’ 사용에 해당한다.” 문제의 핵심은 ‘애국가’를 지은 사람 자체에 있다. “모든 애국가는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기준이 있는데,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 가치를 설득하려면 작곡가 자신이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전제조건이자 정언명령이다. 그런데 안익태의 애국가는 바로 이 요건을 저버렸고, 그 결과로 ‘비애국적 애국가’라는 형용모순의 사태가 빚어졌다는 것이 이해영의 지적이다. 음악학자 김정희는 ‘표절곡을 언제까지 애국가로 부를 것인가’라는 글에서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함께 ‘애국가’의 표절 문제를 살핀다. 안익태는 1921년 일본으로 유학해 음악을 공부하고 1930년 미국의 필라델피아 음악대학 등지에서 첼로·작곡·지휘를 공부한 뒤 1937년 유럽으로 옮겨가 일본의 동맹이던 나치 독일에서 주로 활동했다. 유럽 활동 당시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썼으며, 리스트음악원 등록 서류에 부모의 종교가 일본의 국가종교인 ‘신도’라고 기재했다. 1942년에는 베를린에서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건국 10돌을 축하는 자작 환상곡 ‘만주국’을 지휘하기도 했다. 1943년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회 회원이 됐다. 이때 회원증에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적었다. 이 유럽 활동 시기에 안익태는 ‘코리아 환상곡’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의 4악장에 ‘애국가’ 선율이 포함돼 있다. 이 선율에 실린 노래가 1948년 정부수립 뒤 ‘애국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작곡가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이 곡의 선율이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와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점이다. 애국가의 표절 문제는 1960년대부터 불거졌는데, 김정희는 안익태 애국가와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의 악보를 하나하나 비교하여 전체 16마디 중 12마디에서 선율이 매우 유사하며, 선율의 맥락과 음정의 일치도를 기준으로 한 두 곡의 유사도가 58~72%에 이른다고 밝힌다. “표절이 아니라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김정희는 표절곡을 언제까지 애국가로 부를 것인지 물으며 이제라도 법정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음악교사 신현국은 ‘음악 문화의 가치 선택’이라는 글에서 안익태의 애국가 말고도 현재까지 밝혀진 애국가가 200여 곡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안익태의 애국가에 붙들려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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