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죽음이/ 혁명의 꼭지에 솟아올랐다”
김주열에서 이어진 죽음의 행렬, 그것은 혁명을 위한 희생
이번 시집, 죽은 자들의 이름 불러 역사 속에 되살리기
1만명 인물사전 ‘만인보’ 마무리 단계 접어들어
김주열에서 이어진 죽음의 행렬, 그것은 혁명을 위한 희생
이번 시집, 죽은 자들의 이름 불러 역사 속에 되살리기
1만명 인물사전 ‘만인보’ 마무리 단계 접어들어
고은(73) 시인이 20년 넘게 매달려 오고 있는 역작 <만인보> 제21~23권이 창비에서 나왔다. 이번에 나온 세 권은 1960년 4·19 혁명 가담자들 얘기를 중심으로 꾸며졌다. 1만 명의 초상으로써 당대를 재구성한다는 취지로 출범한 ‘<만인보> 프로젝트’는 대상 숫자가 3천 명으로 줄어든 채 계속 진행 중이다. 책으로 치면 30권에 해당한다. 새롭게 낸 21권의 머리말에서 시인은 “앞으로 나올 몇 권의 초고마저 끝냈”다고 쓰고 있어 한국문학사상 유례가 없을 대작 <만인보>는 이제 마무리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죽음이/혁명의 꼭지에 솟아올랐다/뜨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목이 탔다”(21권 중 <김주열> 부분)
“장차 국민학교 선생님이 되는 꿈 접었다/단발머리 예뻤다/두 강물 만나는/양수리쯤/그 안갯속/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내일의 꿈 접었다//즉사”(22권 중 <원일순> 부분)
<만인보>의 4·19 이야기는 하나의 죽음이 여러 죽음으로 퍼져 나가는, 죽음의 확산이라는 구조를 띤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 와중에 최루탄에 맞아 숨진 학생 김주열의 참혹한 주검이 뒤늦게 발견되면서 점화된 혁명의 불꽃은 4월19일 시위에서 정점에 이르는, 죽음의 연쇄 폭발을 낳는다. <만인보> 21~23권의 거의 전역에서 죽음들은 살별처럼 명멸한다. 죽음을 그린 시의 상당수는 후두부 관통, 심장 관통, 흉부 관통, 즉사, 사망, 또는 총 맞았다, 죽었다 같은 냉혹하고 건조한 표현들로 마무리된다. 짐짓 객관적 진술을 가장한 이런 문체로써 시인은 오히려 사태의 비극성과 혁명의 열기를 강조하려는 듯하다.
거대사 뒷면 ‘소극(笑劇)’에도 눈길
4·19의 죽음들에서는 확산의 양상과 함께 수렴의 면모 역시 확인된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던 삶의 국면들이 그 날 그 자리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일한 이름 아래 통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모적이고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죽음이라고 보아야 옳다. “독재를 끝내려고/생명을 끝냈다”(23권 중 <노희두> 부분)거나 “혁명은/시체에서 태어난다”(22권 중 <나영주> 부분)는 표현이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듯이 그들의 죽음은 더 큰 생명을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개체의 죽음으로써 집단의 생명을 보전하는 행위에 한결같이 파시즘의 딱지를 붙이는 버릇은 무책임 혹은 악의의 소산일 수도 있다. 외형적으로 동일해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 동기와 의미에 대한 세심한 구분은 필요한 법이다. 죽음이 삶으로 몸을 바꾸는 ‘기적’이 한갓 허튼소리이거나 사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래의 시는 역설한다.
“성모병원으로 실려갔다/M1(엠원)에 허벅다리를 맞았다/나에게 피를 넣어주라고/한 아낙이 팔을 걷었다//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살아나고 있었다”(21권 중 <정대근> 부분)
시인은 예의 머리말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번 시집들로써 모색해 보고자 했노라고 밝혔다. <만인보>의 4·19 시편들은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그들을 역사적 의미망 속에 살아 있게 만드는 적극적 호명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만인보>의 4·19 시들이 죽음과 혁명의 장렬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가 반드시 심각하고 진지한 일들의 목록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4·19라는 거대서사의 이면에서 펼쳐지는 소극(笑劇)에도 눈을 준다는 것은 나쁜 의미의 민중주의에 갇히지 않는 <만인보>의 너른 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남편은 혁명진압의 경찰기동대장/벌써 엿새째 집에 오지 않았다/장바구니 들고/동대문 신설동 카바레에 갔다//(…)//동일여관 구석방/한 여자의 육체가 살아난다/죽어도 좋다고/넋 놓으며/1960년 4월 어느 봄밤/한 여자가 뜨겁게 살아난다//한 여자의 음란한 혁명이었다”(21권 중 <그녀의 밤> 부분)
“자유당 물러가라/독재자 물러가라//구호 외치면서/팔뚝시계 셋/돈 20만 7천환/만년필 한 자루/가죽지갑 둘을 낚았다//세상에!/세상에!//눈썹 없는 놈/입술 붉은 놈/전차와 버스 전문 소매치기/그 이름 여기 남겨둔다 전일중”(22권 중 <소매치기 전일중> 부분)
“(낙태수술 뒤 죽은)여중생의 부모는/담당 여의사를 매수/사망진단서 조작/4월19일 시위 도중/경찰의 총 맞아 죽은 것으로 신고했다”(23권 중 <어느 여중생> 부분)
김주열의 주검이 발견되던 순간을 그린 시들에서 시인은 “이런 시절에도/중앙부두 물 위에 낚시꾼이 있었다”(21권 중 <김주열>) 또는 “그 사태에도/낚시꾼들은 낚시에 나섰다”(21권 중 <어떤 낚시질>)며 낚시꾼들의 무신경을 지적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발견이 시위의 확산을 낳았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역사의 엄연한 주역이라 할 법하다. 그렇다면 역사란 비극과 희극의 교차 반복이라기보다는 그 둘의 공존 속에 이어져 가는 성질의 것이 아닐까.
<만인보>가 역사주의와 민중주의를 넘어 불교적 놓음과 초탈로 나아가는 대목을, 가령 21권의 첫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제작상 실수는 거슬려
“바람이 온다 나는 간다//몽골독수리 둘이/나를 본다//이내 내려앉으리라//내생 필요없다”(21권 중 <어떤 임종> 전문)
<만인보> 21~23권은 4월혁명이라는 현대사의 일대 국면을 문학의 이름으로 소환한 야심작이다. 그럼에도 크고 작은 제작상의 실수들이 독자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김승옥씨의 콩트 <정직한 이들의 달>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서울 문리대 수학과 학생 김치호는 “수학과 학생”(21권 중 <김치호>)과 “물리학과 3학년”(22권 중 <김치호>)으로 섞여 나온다. 4·19 관련 사망자 중 ‘김치호’는 묘역번호 201호에 안장된 수학과 학생 김치호가 유일하다. 22권 <권한승>의 주인공은 23권 <전한승>의 ‘전한승’이 맞는 것 같다. 둘 다 수송국민학교 6학년이고, 4·19국립묘지에는 묘역번호 195번에 ‘서울 출생 남 전한승’이 묻혀 있다.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22권 중 <이창원>)은 ‘참성단’의 잘못이 아닐까. ‘장택상’이 ‘장태상’으로(23권 중 <금홍>), ‘박정희’가 ‘바정희’로(23권 중 <가영훈의 아내>에 세 차례나!) 오기(誤記)되어 있는 것도 거슬린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개체의 죽음으로써 집단의 생명을 보전하는 행위에 한결같이 파시즘의 딱지를 붙이는 버릇은 무책임 혹은 악의의 소산일 수도 있다. 외형적으로 동일해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 동기와 의미에 대한 세심한 구분은 필요한 법이다. 죽음이 삶으로 몸을 바꾸는 ‘기적’이 한갓 허튼소리이거나 사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래의 시는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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