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문사회과학에 충격 안긴
칠레 생물학자 마투라나 대표작
인지는 실재의 반영 아닌 재구성
칠레 생물학자 마투라나 대표작
인지는 실재의 반영 아닌 재구성
자기생성 개념 창안으로 인문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끼친 칠레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 위키미디어 코먼스
살아 있음의 실현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l 갈무리 l 2만1000원 움베르토 마투라나(1928~2021)는 ‘자기생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칠레 생물학자다. 마투라나의 초기 연구는 신경생물학에 집중됐는데, 이 연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두 편의 논문이 1969년 발표한 ‘인지생물학’과 1972년 동료 생물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함께 쓴 ‘자기생성: 살아 있음의 조직’이다. ‘자기생성과 인지’는 이 두 편의 논문을 묶은 책이다. 1980년에 나온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겼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마투라나 생물학에 자극받아 사회체계이론을 확립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20세기 후반 이래 학문 세계를 흔들어댄 이 간결하고도 밀도 높은 저작이 마투라나 연구자 정현주(전남대 철학박사)의 번역으로 나왔다. 이 책의 서문에서 마투라나는 대학에 들어간 이후 두 가지 핵심 물음이 줄곧 자신을 따라다녔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는 ‘생명체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명체는 주위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였다. 첫 번째 물음이 후에 ‘자기생성’으로 귀결했고, 두 번째 물음이 ‘인지생물학’으로 열매를 맺었다. 마투라나는 생명체를 ‘살아 있는 체계’라고 부르는데, ‘살아 있음’을 본질로 하는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개별 세포에서부터 인간·동물을 거쳐 사회체계까지 모두 ‘살아 있는 체계’에 속한다. 초기 연구 과정에서 마투라나는 이 ‘살아 있는 체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기존 생물학의 틀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때까지 생물학은 생명체를 ‘외부로 열린 체계’로 이해했다. ‘생명체는 외부의 목적을 향해 활동하는 가운데 외부의 규정을 받는다’는 것이 생물학의 일반적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가정으로는 ‘살아 있는 체계’의 고유한 특성이 설명되지 않았다. 여기서 마투라나는 일종의 ‘도약’을 감행한다. ‘살아 있는 체계’를 열린 체계가 아닌 닫힌 체계로 본 것이다. ‘살아 있는 체계’가 외부와 신진대사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은 이 체계가 ‘자기에 준거하는 폐쇄적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체계는 외부의 목적을 향해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스스로 완결되는 시스템이다. 이 생명 체계의 특성을 설명하는 말로 마투라나가 창안한 것이 자기생성 곧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다. 그리스어에 기원을 둔 오토포이에시스는 ‘자기를 스스로’(auto-) ‘만들어낸다’(-poiesis)는 뜻이다. 자기가 자기를 생산하는 자기생성이야말로 세포-인체-사회를 아우르는 ‘살아 있는 체계’의 본질이다. 마투라나가 자기생성 개념에 다가가는 과정은 실험실에서 개구리나 비둘기의 시지각을 연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실험실 관찰에서 마투라나는 ‘동물들의 지각(인지) 방식’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는데, 그 통찰을 이야기하는 논문이 ‘인지생물학’이다. 여기서도 마투라나는 기존 생물학의 가정을 돌파하는 ‘도약’을 감행한다. 기존 생물학의 인식론은 ‘관찰자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의 인식론’이었다. 다시 말해, 외부의 실재는 관찰자에게서 독립해 있고, 관찰자는 그 독립된 실재를 있는 그대로 지각한다는 것이 기존 생물학의 가정이었다. 그러나 개구리와 비둘기의 시지각 연구는 사태가 그런 가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개구리나 비둘기 같은 ‘관찰자’는 객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외부에서 받은 시각적 자극을 시신경 내부의 폐쇄된 뉴런 체계 안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한다. 다시 말해 색깔이든 형태든 신경계 내부의 구별 체계 안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관찰자의 목표는 사물을 구별하는 데 있지 그것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더 의미심장한 발견은 이 관찰자가 실제로 ‘지각’을 하든 실재와 무관하게 ‘환각’을 경험하든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신경계가 일종의 자기준거적 폐쇄 체계여서 그 닫힌 체계 안에서는 지각이든 환각이든 모두 실재에 대한 인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이 지각 체계는 외부 세계에서 독립된 자율 체계이며 인식은 그 지각 체계 안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태는 하등동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도 자기 내부의 인식 체계를 통해 지각을 재구성한다. 외부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보는 우주도 우리 내부의 폐쇄적 인지 체계 안에서 구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투라나는 이 발견의 내용이 ‘일종의 우주론’이고 ‘초월적 경험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하면서 그 발견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물질은 정신이 창조한 것이고, 정신은 물질이 창조한 것이다.” 물질이 인지능력을 창조하고, 그 인지능력이 다시 물질의 존재 양태를 재구성한다는 이야기다. 이어 마투라나는 ‘자기생성’과 ‘인지’를 종합한다. 모든 살아 있는 체계는 자기생성 체계이며 이 자기생성 체계는 인지를 통해서 자기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자기생성 체계는 인지 과정이 있는 동안만 존재한다. 인지 없는 생명은 죽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자기생성과 인지 과정은 하나다. 이 책을 쓰고 난 뒤 마투라나는 자신의 생물학 이론을 사회체계로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책의 서문은 간략한 도식으로 그 사회체계론을 그려 보여준다. 사회체계가 체계인 한 그 체계는 자기 유지 관성이 있고, 그 체계를 구성하는 개별 인간의 뜻과는 무관하게 움직인다. 그리하여 그 관성이 극단화하면 사회체계는 모든 개별 인간을 체계 유지에만 이용하는 전체주의 체계가 된다. 전체주의 체계는 인간 학대를 제도화한다. 그러나 개별 인간은 그 체계 안에 있음과 동시에 관찰자로서 인식론적 거리를 두고 그 체계를 볼 수 있다. 그 거리에서 체계의 관성을 거스르는 관찰자의 창의성이 나온다. 창의적 관찰자들은 다른 관찰자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학대 체계 자체를 바꾸는 반사회적 활동을 감행할 수 있다. 그것이 혁명이다. 혁명은 인간의 동등성과 자율성이 보편적으로 보장되는 학대 없는 체계를 이룰 때까지 반복된다. 그런 혁명을 거쳐 도달하는 사회가 ‘아나키즘 사회’라고 마투라나는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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