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현대문학상에 이어 김현문학패 상을 수상한 시인 황유원(41)이 이달 네 번째 시집을 냈다. 창비 제공
황유원 지음 l 창비 l 1만1000원 모처럼 서정시다. 시인 황유원(41) 덕분이다. 그가 먼저 걷고 노닌 길엔 청량한 언어들만큼 종이 울리고 눈이 내린다. 시인은 서정시 안에서 부부싸움도 하고, 에어 서플라이 노래를 듣고, 마루에 가만 누워 비행기의 사라지는 굉음을 좇아가도 보는 것인데, 이런 일상조차 무척이나 고요해 아무래도 시집의 “볼륨은 제로”이지 싶다. 새 시집 ‘하얀 사슴 연못’에선 폭설도 수굿하다. “꿈에 백발이 되었다/ 머릿속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리 위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서/ 머릿속엔 아직 눈이 내리나보다/…/ 이제 저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가끔 눈부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백지상태’ 부분) 걷는 건 멀어짐이고, 멀어짐은 사라짐이다. 백지처럼 새하얘지는 것이니, 이야말로 겨울의 처사다. 시 ‘올해 가장 시적인 사건’에선 2020년 11월 말 아내와 다툰 이탈리아 남자가 421㎞를 삐쳐 걸었던 일이 옮겨졌다. 아흐레 동안, 시인은 기웃거린다. 시가 죽을 새가 없다. 에스토니아 음악가 이름을 딴 아르보 패르트 센터는 35㎞ 멀리 수도 탈린에서 도보로도 가능하다고 안내한다. 시인은 아예 권한다. “…당신은 음악이 가까이 손 닿을 데에 있어서 그것을 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종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받습니다.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고, 그러니 사라지기 위해서라면 35킬로미터로도 한참 부족할 테지만…”(‘아르보 패르트 센터’ 부분) 사라지는 것은 마침내 환생한다. 그것이 시인의 처사다. 읊어볼까.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살이 오른 사슴들이/ 빈 표지 같은 내 가슴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와/ 마실 물을 찾는다”(‘하얀 사슴 연못’), 속삭이고 걸었을 뿐인데 “현실이 뒤늦게 문장을 뒤따르고” “내게는 아까부터 내리고 있던 눈이/ 뒤늦게 네게도 내리고 있”(‘밤눈’)다. 등단 10년을 채운 황유원의 주술이랄까. 그가 김수영문학상(2015년)을 받은 지도 어느새 8년이 됐다. 이후로도 스승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앞서 그는 “들어가서 나오고 싶지 않은 시적 세계의 한 극치”로서 정지용의 ‘백록담’(1941, 초판본 표지에 사슴이 있다)을 꼽은 바 있다. 지난해 말 현대문학상 수상 소감에서다. 긴 시가 영감과 자질을 증명한다는 제 지론에 대한 완벽한 반론이라고 그는 썼다. 시집엔 정지용에 대한 오마주와 시감이 적이 있다. 또한 사라진 서정의 환생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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