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2차대전에서 무조건 항복 한 다음날인 8월16일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석방된 독립운동가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는 모습. 역사학자 정병준은 “당시 일본의 패망이 한국의 해방과 독립의 길로 연결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해방의 공간’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5년 해방 직후사
현대 한국의 원형
정병준 지음 l 돌베개 l 2만7000원
일본은 1945년 8월14일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며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고, 다음날인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발표됐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이 곧바로 한국의 해방·독립의 길로 연결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인들이 전찻길에 운집해서 만세를 부르는 유명한 장면은 15일이 아니라 그다음 날인 16일에 촬영됐다. 이날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독립투사들이 풀려나는 등 식민권력의 후퇴가 가시화되자 비로소 ‘해방의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후 역사가 증언하는바, 이렇게 끓어올랐던 해방의 희망과 열정은 분노와 좌절의 대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1945년 해방 직후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잠들어 있던 사료를 발굴해 한국 현대사를 입체적으로 보는 눈을 제공해온 역사학자 정병준(이화여대 교수)의 ‘1945년 해방 직후사’는 1945년 해방 공간 속에 어떤 힘들이 서로 교차했고, 그 결과 어떻게 ‘현대 한국의 원형’이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 기록되지 않은 역사, 그러나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이 된 역사를 다룬”다는 지은이의 말처럼,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대어 ‘모스크바 3상회의’ 이전에 이미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한국 관련 정책을 뒤엎었던 미군정과 이승만·한국민주당(한민당)의 ‘알려지지 않은’ 반탁운동, 조선총독부·미군정에 줄을 대며 집요하게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공격했던 한민당의 행태, 우익·기독교 그룹과 교육받은 엘리트 등 ‘문고리 권력’에 의존하며 해방 공간의 열망을 무력화시킨 미군정 초기의 실책 등이 새로운 사료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지은이는 “해방 공간에서 건준이라는 자생 권력이 조선총독부가 세운 전후 대책과 상호작용하며 일제 통치의 유산 위에 존재했다”고 본다. 패전 이후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가 점쳐지던 때에 조선총독부는 8월10일께부터 건국동맹을 이끄는 여운형(1886~1947) 쪽과 ‘치안 유지’를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조선총독부가 볼 때 “조직력과 영향력은 물론 합리성과 교섭력을 가진 좌파 인물”인 여운형은 교섭 대상으로 적격이었다. 여운형은 일본 패전이 확정되는 순간을 틈타 정치·경제범 즉시 석방, 식량 확보, 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등 다섯 가지 조건을 내걸고 ‘치안 유지’ 협력을 수락했는데, 이는 해방의 혁명적 열기를 포용한 건준을 만들어 “사실상 행정권 이양 및 포기”를 이뤄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총독부의 ‘치안 유지’ 대책을 “치안유지권, 집회결사의 자유, 정치범 석방, 자치권을 공인해주는 실질적 행정권 이양으로 진행”한 것은 건준의 역량이었으며, 이는 서울 중앙뿐 아니라 각 지방에까지 미쳤다.
1945년 8월16일 연설을 위해 서울 휘문중학교에 들어서고 있는 여운형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다만 이런 흐름 아래에는 “건준을 주도한 여운형, 좌파 세력과 안재홍, 한민당 등 우파 세력의 힘겨루기와 총독부의 개입 및 공작이 뒤엉켜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건준은 본질적으로 한국인들의 자생적 권력이자 일제 통치의 잔재와 공존하는 과도적이고 이중적인 권력이었다.” 예상과 달리 한반도 남쪽에 미군이 진주할 것으로 드러나자, 해방 공간의 헤게모니를 쥔 건준에 대한 집요한 공격들이 이어졌다. 건준은 좌우파를 모두 망라하는 등 ‘민족통일전선’을 추진했으나, 지은이는 알려진 바와 달리 송진우 등 한민당 계열은 건준에 참가한 적 없다고 말한다. 단지 밖에서 건준을 치안유지회 등 비혁명 조직으로 변화시키려 했으나 “참담하게 실패했다”는 것이다. 친일파일 수밖에 없는 ‘유지’들로 해방 공간의 권력을 구성하는 것은 대부분 친일파였던 한민당과 총독부 모두가 바라는 바였다. 한민당은 여운형과 건준을 “친일 정권이자 공산주의자”라는 양립 불가능한 주장으로 무고하는 한편 ‘중경임시정부 귀국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자생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나섰고, 총독부는 한민당 쪽에 비자금을 건네며 이를 함께했다. 여기에 건준은 스스로 좌익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급조함으로써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로부터 지지를 잃고, “해방 공간에서 건준이 가졌던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입장은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입장으로 역전되었다.”
카이로선언(1943년), 포츠담선언(1945년) 등을 통해 국제사회는 한국에 대해 ‘다자간 국제 신탁통치’ 계획을 합의해둔 상태였고, 미 국무부는 점령 지역에서 “특정 정치 세력과 연계해선 안 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이 같은 국제사회의 합의와 본국의 방침을 뒤엎고 “임시정부 후원에 기초해 신탁통치 계획을 부인하고 독자적인 과도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임시정부 계열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미 미군정 초기부터 미군정은 한민당·이승만 등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반탁운동을 벌이고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이다. 이승만 귀국 뒤 추진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는 미군정·이승만·한민당이 벌인 3중주로, 진주 1개월 만에 독자적인 과도정부 수립으로 향했던 미군의 노선을 잘 보여준다. 이는 한반도 남쪽의 자생 권력이었던 인공을 인정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해체’를 명령하여 이를 불법화한 경로와 일치한다.
서울 시민 주최 연합군환영대회(1945년 10월20일) 당시 아치볼드 아널드 군정장관(가운데)과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아널드의 왼쪽), 그리고 하지의 ‘문고리 권력’이었던 통역관 이묘묵(아널드 오른쪽)의 모습. ⓒNARA 돌베개 제공
미군정 초기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개인비서 겸 정치고문으로서 ‘알려지지 않은 정책 결정자’였던 조지 윌리엄스. ⓒNIS 돌베개 제공
지은이는 미 본국의 외면·방치와 함께, 당시 미군정에 영향을 준 ‘문고리 권력’에 주목했다. 미 24군단은 진주 전에는 일본군으로부터, 진주 후에는 “기독교 그룹, 교육받은 엘리트, 선교사 사회” 등 한민당 계열에 해당하는 우파들에게 기대어 정보를 수집했는데, 이들은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침소봉대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개인비서·정치고문이었던 조지 윌리엄스(1907~1994)다. 윌리엄스는 단지 선교사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에 유창하다는 이유로 미군정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떠맡았으나, 그 역량과 자격조차 불분명한, “아무도 아닌 자”였다. 윌리엄스는 파괴적 공산주의 집단인 인공이 대중적 지지도 없이 총독부로부터 권력을 건네받았고, 보수주의적·친미적이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착한 편’ 한민당이 여기에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아무도 아닌 자”들의 입김 아래, 미군정은 해방 공간의 자생 권력을 부정하고 핵심 권력인 경찰·사법기관 등 공직을 대대적으로 불하했다. 적절한 자격시험이나 배경 검토 없이 마구잡이로 이뤄진 충원과 추천 속에, 친미·반공·기독교·연희전문학교 등의 배경을 가진 한민당 계열이 이를 주로 꿰찼다. 예컨대 경무부장이 된 조병옥, 초대 충남도지사를 지낸 황인식 등 윌리엄스의 아버지가 세운 공주 영명학교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한국인의 이해와 요구와는 거리가 먼,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춘 관료기구가 탄생”한 배경이다.
역사학자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지은이는 “해방 후 한국의 정치적 과제는 남북통일, 독립국가 건설이었으며,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잔재를 일소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한반도를 갈라놓은 미군은 이 땅의 주체인 한국인들의 열망을 무시했고, 그 결과 들어선 것은 “불하받은 벼락 권력”이었다. 책의 부제가 ‘현대 한국의 원형’인 까닭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