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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계급 문제나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키는 사회 [책&생각]

등록 2023-12-01 05:01수정 2023-12-01 11:18

신자유주의 공고, 남성 문화 반발 속
‘지금 여기’ 여성들의 구조적 문제

성소수자·난민 차별은 페미니즘 아냐
피해자 중심주의·여성성 자원화 비판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11월12일(현지시각)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의 집을 찾아 건강 상태를 살피고 있다. 오른쪽은 김 여사의 사진이 비슷하다고 비교된 배우 오드리 헵번 사진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이나 전체 집단을 이용하는 행위는 가장 뿌리 깊은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대통령실 제공, 에스엔에스 갈무리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11월12일(현지시각)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의 집을 찾아 건강 상태를 살피고 있다. 오른쪽은 김 여사의 사진이 비슷하다고 비교된 배우 오드리 헵번 사진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이나 전체 집단을 이용하는 행위는 가장 뿌리 깊은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대통령실 제공, 에스엔에스 갈무리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l 교양인 l 1만8000원

‘남성중심 사막’에서 ‘정희진이라는 오아시스’를 만났다. 이 오아시스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로 앞으로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현실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 전략을 명료하게 말해준다.

2005년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통해 남성 언어로 길들여진 한국 사회에 균열을 내며 여성주의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18년 만에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으로 페미니즘의 최전선에 섰다.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의 장이 벌어졌지만, 젠더 권력을 움켜쥔 남성 문화의 저항은 더 강렬해졌다. 또 여성주의를 지향한다는 사람들이 성 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적대와 탄압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거나 도외시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대선 후보 배우자 김건희씨의 이력 검증을 두고 일부 진보 인사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혐오”라며 그를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만들어주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젠더 각본 사회를 비판적으로 톺아본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를 쓴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페미니즘은 사회와 일상에서 젠더, 계급, 인종, 세대 등에 의한 불평등을 문젯거리로 보고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말, 행동, 전략, 실천”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대로라면 이런 일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선 안 된다. 김현미 교수와 같은 맥락으로 정희진 역시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을 문제 삼으며 “난민과 성폭력을 연결하는 사고는 무지 혹은 의도된 오식”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흑인, 난민, 노숙인은 쉽게 가해자로 간주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여성의 성폭력 관련 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그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는 가해자의 70~80퍼센트가 아는 사람이며, 그들의 30퍼센트가 친인척(가족)이다. 피해 장소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한국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제1세력은 난민이 아니라 가까운 남성들인데, 갑자기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저자가 느끼는 답답함이 책에 오롯이 전해진다.

대선 후보 배우자로서의 김건희씨 검증에서도 마찬가지다. “검사와 피의자 가족으로 만난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구조를 혁파하는 것이 검찰 개혁”인데, 김건희씨에 대한 검증을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한 세력들이 있었다는 점에 그는 개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은 착하고 여성을 비난해서는 안 되고, 아무리 여성이 범죄를 저질러도 남성의 범죄보다 약하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접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처럼 ‘지금 여기’ 한국 여성들이 놓인 구조적인 모순을 천착하고 그 구조 안에서 다양한 대응을 해가는 여성들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여성주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피해자 중심주의’ 담론에 대해서도 매섭게 비판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동어 반복일 뿐 여성에게 불리한 논리”라는 주장이다. 피해와 가해 여부는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주목한다. 누구나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피해자라는 지위는 논쟁과 경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 중심주의’ 논리가 힘을 얻으면서 여성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피해 여성의 입장이 더 객관적이라고 믿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범죄나 신고가 접수되면 피해자 말부터 듣는 것은 당연하다. 평소 사회가 성폭력의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해 왔다면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현실은 남성 중심 문화가 공고하고 피해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 역시 남성 중심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전략적으로 ‘피해자 중심주의’가 나왔지만 이것이 페미니즘의 주요 논리로 강화된다면 ‘피해자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규범적인 이미지만 강고해질 뿐이다. 따라서 저자는 피해·가해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 “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이토록 만연한가를 묻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질문을 하냐는 중요한데, 저자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제시한다.

저자는 최근 20~30대 남성들이 “왜 남자만 군대 가냐?” “여성의 지위가 예전보다 더 나아졌는데 왜 여성 할당제를 하냐?”며 남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속시원하게 이 주장의 빈약함을 입증한다. 언론들은 이런 남성들의 등장을 두고 ‘젠더 갈등’이라고 쓰고, 정치인들은 ‘젠더 갈등’을 부추기며 표를 얻기 위해 악용한다. 남성 중심의 성차별 사회를 방증하듯 정치인들은 남성 유권자의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 “여성 인권을 누가 더 멀리 내팽개치나 경쟁”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들은 “젠더 갈등이 아니”며 20대 남성과 성공한 ‘50대 남성’의 자녀 간의 계급 문제이거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 문제를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본다. 2021년 기준 국공립대 여성 교수 비율은 18.6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남성들의 반발은 거세다. 반면에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은 30퍼센트 남성 할당제(성비 제한제)가 적용된 지 오래인데도 사회적 반발은 적다. 저자는 “실제로 여성 할당제는 거의 없고 대부분 특정 성이 30퍼센트 이하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성 할당제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광각 렌즈’를 달고 한국 사회를 넓게 조망하되, 신자유주의적 구조가 공고화되면서 달라지고 변화된 여성들의 현실과 여성주의 담론에 대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각 사안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주는 점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남성 중심 사고방식과 남성 중심 언어에 익숙해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남성들이 우선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또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겼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두루뭉술하게만 알고 있는 여성들도 읽어보면 좋겠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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