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 산불을 진화하며 한 구조대원이 코알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2019년 발생한 이 산불은 8개월 만에 겨우 잡혔다. 케이프보다/EPA 연합뉴스
들끓는 꿈의 바다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l 창비 l 1만7000원
“11월은 가장 슬픈 달이에요. …새들이 매년 다시 돌아오는 시기거든요. 돌아오지 못하는 녀석도 있고요. 매년 그런 녀석들이 늘어나요. 돌아온 녀석들도 애당초 몇 마리 되지도 않는데 하나씩 죽어가요. 무사히 부화하는 알도 몇 개 안 되는데, 어린 새끼들이 죽는 게 최악이에요. 어쨌든 나한테는 그래요. 우리는 녀석들을 살리려고 갖은 수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도 녀석들은 계속 죽어요. 계속 죽고 또 죽어서 매년 내가 가보면 수가 줄어들어 있어요. 어찌나 줄어들었는지 내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한 때가, 그때는 위기처럼 보였는데, 지금에 비하면 진짜 에덴동산 같아요.”
작중 한 여성 환경운동가(리사 샨)의 말이 끊길 듯 이어지는 애가처럼 들렸던 이 장편소설의 제목은 ‘들끓는 꿈의 바다’다. 뒤따르는 주인공 애나의 진술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일 것이다.
“가끔 그녀는 새들이 앙심을 품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지쳐서, 자신들을 도우려는 인간의 노력이 자꾸 실패하는 데 지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 같다고. 세상이 그들에게 워낙 적대적이기 때문에.”
새의 이름은 현재 소멸 중인 노랑배도라지앵무. 살리려는 자들과 죽으려는 자들의 대결은 낯설거니와 대수롭지도 못하다. 죽이려는 자들의 무지하고 무도한 세계에서 둘의 갈등이 눈길이나 끌겠는가. 그럼에도 무력한 이들끼리의 대립이 처절해짐으로써 마침내 죽이(려)는 자들의 세계도 폭로된다. 이 소설이 지능적으로 운용하는 서사의 방식이고, 주제이자 소재다. 자각 않거나 못한 사이 난무하는 ‘죽임’의 추문과 실체가 그나마 ‘당신’에게 인지되고 감각되리라는 작가의 바람이라 해보자.
여기 천혜의 영토, 2차대전 당시 유대인이 자신들의 터전을 건설하려던 곳, 오스트레일리아의 남부 섬 태즈메이니아. 이 땅의 고유종인 노랑배도라지앵무처럼, 프랜시도 여든을 넘어 서서히 소멸 중이다.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간다. 뇌수종 시술을 받는다. 3년 뒤엔 비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는다. 천천히 진전되는 암이다. 그 뒤엔 뇌출혈이 닥친다. 남편을 먼저 보낸 뒤 두살 터울씩의 네 남매를 키운 프랜시는 이어 요로감염, 패혈증, 신부전에 따른 사경에서 여든일곱이 되어 있다. 생사를 오갈 때 첫째 딸 애나(56)에게 찾아든 심사는 정결하지 않다.
“…죽음은 감당할 수 있었다. 삶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 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확실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에게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대한 짜증스럽고 예기치 못한 저항이었다….”
고비가 더해지며 의료진은 수술은 물론 신장투석도 만류한다. 네 남매 중 막내, 가장 성공한 벤처사업가인 터조의 막무가내 주장-“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유일하다”는-에 압도되어 남매들은 하염없이 연명치료를 이어간다. 그간 프랜시를 돌봐왔던 무능한 둘째 토미만 태도가 다를 뿐이다. 터조와 애나는 시드니 등지에서의 도시 생활로 소홀했던 노모에게 죄책감이 없지 않다. 죄책감은 죄책감일 뿐인가. 애나는 막상 프랜시가 병원 대신 딸의 집을 원해 “아이처럼 말썽을 부리지 않겠다”고까지 사정할 때, 단호하다 못해 “괴물처럼” 거부한다. (소설이 여성에 의한 여성 돌봄의 문제를 함의하는 건 아니다.)
프랜시는 어느 지점부터 말한다, 사력을 다해. “난 이미 끝에 다다랐어”, “난 이만 가고 싶다”, “Let me go(날 보내줘)”. 애나가 한 말은 이것이다. “몸이 나을 거예요”, 놀란 건지 겁먹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엄마에게 “계속 살아갈 거고요.”
2020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주 이스트 깁스 랜드의 오보스트 지역에서 진행 중인 산불 위성사진. 미국의 우주기술회사 막사 테크놀로지가 그달 4일 공개했다. EPA 연합뉴스
프랜시와 노랑배도라지앵무의 처지가 같을 순 없다. ‘소멸’의 의미도 다르다. 다만 그 둘을 품은 대륙은 같은 시각 불타는 중이었다. 울타리를 붙잡은 채 타 죽은 캥거루, 숯덩어리가 된 코알라, 시꺼멓게 부푼 몸으로 드러누운 소, 불기둥에 뒤집힌 소방차에 죽은 소방관, 4천명을 좁은 해변으로 내몰고 이미 태운 곳을 마저 또 태워 삼키는 화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연기와 재…. 2019~20년 세계를 질식시킬 듯 달려들던 오스트레일리아 화재의 형상인데, 더 앞서 절멸 위기에 놓였던 유대인이, 더 일찍이 절멸되고 만 이 땅의 원주민들이 있었다.
그 무엇보다, 기척도 없이 사라진 존재들은 또 얼마나 차고 넘치는가. 작가가 가장 주목하는 지점일 것이다. 소멸당하고 있으나 그 순간조차 드러나지 않은 존재들. “지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유이고, 결국 살리려는 자들과 다투는 연유가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 또한 애나다. 애나는 손가락, 무릎, 가슴 한쪽과 같이 신체가 부분씩 불쑥 사라지는 기이한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그러한 소멸의 사실은 소멸을 인지하는 이들이 없다는 사실만큼 기이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터조가 프랜시의 연명치료에 매달리는 배후 역시 상징적이다. 열네살 때 자살한 자신의 바로 위 형 로니(셋째)에 대한 자책이 그것인데, 절멸의 기척을 알아채는 일의 중요성을 에두르기 때문이다. 이젠 적응해야 할 관습이 되어버린 듯한, 기후위기의 진짜 위기가 갖는 속성 그대로인 것이다.
‘들끓는 꿈의 바다’는 ‘클라이파이’(Cli-fi, Climate fiction)에 들겠으나, 이 소설엔 전망이 없다. 가령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누구도 낙관하거나 비관하진 않는 것과 다르지 않겠다. 애오라지 슬픔만이 있다. 어떤 슬픔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그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같았다. 아름다움과 더불어 사는 것. 그들은 아름다움을 견디지 못한다. 정말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새와 물고기와 동물과 식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녀(리사 샨)가 이렇게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인 듯싶었다. 때로는 가뭄 때의 강바닥처럼 사랑이 바싹 말라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62). ‘굴드의 물고기 책’으로 2002년 영연방 작가상,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로 2014년 맨부커상을 받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러니 전망 없는 이 소설이야말로 가장 비관적이고 절박한 기후소설이다.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자연이 소멸하거나, 사실상 이미 죽은 뒤에야 살리겠다 붙잡게 되거나, 하여 돌봄도 폭력이 되고 마는 사태 등의 중층적 의미. 2014년 부커상과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이 재앙 뒤 내놓은 신작의 육중한 메시지다. 읽히는 소설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소설의 무게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